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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Aug 31. 2020

봉숭아 물들이기

자매들의 추억 나누기

나는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친정아버지는 오빠와 언니, 나를 낳고 그만 낳길 원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던 친정 엄마는 아들 하나 더 낳을 욕심에 내 밑으로 딸을 둘이나 더 낳고 그 밑으로 드디어 아들을 낳으셨다.     


하지만 막둥이 남동생은 태어난 지 세 이래 만에 심장이 좋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막둥이 아들을 잃은 슬픔에 한없이 눈물지으시던 아버지의 모습과 넋 나간 그때의 엄마 얼굴, 하얀 강보에 온 몸이 차가워진 남동생을 곱게 싸매 들고 어디론가 나가시던 외숙모의 뒷모습이 생각난다.

     

오빠와 언니는 두 살 터울, 그리고 우리 자매들은 모두 세 살 터울을 두고 태어났다. 학창 시절에 우리 집은 초등학생과 중학생,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한 집에 북적이며 살았다. 오빠와 막내 동생은 열한 살 차이가 났기 때문에 막내 동생이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오빠는 대학생이 되었다.  


자랄 때 초등학생과 중학생, 중학생과 고등학생, 고등학생과 대학생의 차이는 서로 견줄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난다. 하지만 결혼하고 하나 둘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부터는 함께 늙어가는 사이가 되는 것 같다. 특히 우리 네 명의 자매들은 누가 언니이고 누가 동생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나이가 엇비슷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표현은 막내 동생이 손해 보는 표현일 테지만 말이다.  

 

친정엄마가 돌아가신 후부터 우리 네 자매와 오빠의 아내인 올케까지 다섯 자매가 된 우리는 해마다 여름방학이 되면 남편들을 집에 남겨 두고 2박 3일 동안 모인다. 여자들만의 세상은 얼마나 자유롭고 재미있고 맛깔난지. 서로 모여 자기가 잘하는 음식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어려서 좋아했던 언니 동생의 음식을 이제까지 기억하며 즐겁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밤새 하하 호호 까르르 거리며 해마다 여름밤에 꼭 잊지 않고 치르는 행사는 손톱에 봉숭아 물들이기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어린 시절을 추억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랬던 것 같다. 올 해는 막냇동생 집에서 모였는데 올케 언니는 휴가가 살짝 엇나가서 우리 네 자매끼리 하루 전에 미리 만나 봉숭아 물을 들였다. 그리고 올케 언니가 와서 다시 또 한 번 더 들였다.  


언니랑 나랑 바로 밑의 동생은 한번 들여도 좋은데 막냇동생은 진하게 물들이는 것을 좋아해서 자꾸 두 번씩 들이자고 조르곤 한다. 몇 년 뒤면 막내도 회갑이 되지만 그래도 우리보다 젊어서 더 붉게 정열적인 색이 좋은가보다.ㅎㅎ


몇 년 전부터는 봉선화 꽃을 구하기도 쉽지 않고 손톱에 물들이는 과정이 귀찮아지기도 해서 "이제 올해만 들이고 내년부턴 들이지 말자"약속하지만 매해 여름이 되면 다시 봉숭아 물 들일 준비를 하느라 이리저리 봉숭아 꽃을 찾아 헤맨다.







올 해는 막냇동생이 출장 나갔다가 봉숭아(봉선화) 꽃과 잎을 가까스로 구했다고 한다. 봉숭아 물이 손톱에 잘 들게 하려면 잎과 꽃을 따서 줄기를 제거한 후에 삐들삐들해질 때까지 말려야 한다. 시들시들 마른 꽃잎과 꽃에 백번과 소금을 적당히 넣고 절구에 찧는다. 그리고 서로 손가락에 찧은 봉숭아를 얹은 후 비닐로 덮어 반창고로 손가락을 칭칭 동여매 준다.







소금기와 백번 탓인지 밤새 손가락이 욱신거리지만 손톱을 더 곱게 물들이기 위해 참아내며 잠을 설친다. 날이 새면 후다닥 동여맨 것을 풀어내고 누구의 손톱이 더 예쁘게 물들었는지 자랑을 하면서 물이 잘 들었다며 좋아하기도 하고 조금 아쉽다고 서운해하기도 한다.

      






아가씨들이 첫눈 오기 전까지 손톱에 봉숭아 물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어서 봉숭아 물들이기를 했는지는 모를 일지만 우리 다섯 자매는 모두 시집을 갔기 때문에 첫사랑을 기다릴 일은 없어졌다.

그저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우리 자매들은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인 다음 날엔 밖에 나가 영화도 보고 멋진 카페에도 가고 맛집도 찾아다니고 했었는데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집콕하며 대형 티브이 앞에 앉아 비긴 어게인 3을 보면서 누구의 손톱이 더 붉게 물들었나 견주어 봤다.







비긴 어게인 3에선 소렌토 루프탑에서 하림의 아코디언 연주와 헨리의 바이올린 연주에 맞춰 박정현이 하비샴의 왈츠를 불렀다. 비긴 어게인 3가  끝나고 나서 영화관에 못 갔으니 집에서라도 다 같이 영화 한 편 보자는 의견에 따라 <우리들>이라는 영화를 봤다.







영화 내용 속에 우연히도 어린 소녀 둘이 봉숭아 물들이는 장면이 나왔다. 영화에서 봉숭아 물들이기는 우정을 나누는 매개물이 되고 있었다. 이렇게 손톱을 예쁘게 물들여주는 봉선화를 생각하면 이유 모르게 왠지 짠한 생각이 든다. 아마도 봉선화 노래 때문인 듯하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거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 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이 예 있나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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