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가 해주신 이불 리폼하기

엄마 추도식 날 꺼내 보는 이불

by 김경희


엄마의 일생


단 하루 만이라도 엄마와 같이

있을 수 있는 날이 우리들에게 올까?

엄마를 이해하며 엄마의 얘기를 들으며

세월의 갈피 어딘가에 파묻혀 버렸을

엄마의 꿈을 위로하며 엄마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내게 올까?


하루가 아니라 단 몇 시간만이라도

그런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엄마에게

말할 테야. 엄마가 한 모든 일들을,

그걸 해낼 수 있었던 엄마를,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엄마의 일생을

사랑한다고.

존경한다고.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중에서-



<아내의 일기>


오전 9시경에 익산 사는 막냇동생한테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언니, 엄마가 지금 횡단보도에서 자동차 사고로 병원으로 실려 가셨대. 경찰한테 전화가 왔는데 상태가 위중한가 봐. 나도 지금 조퇴 신청해 놓고 가고 있으니까 언니도 빨리 병원으로 와”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팔십 넘으신 노모께서 이른 아침에 교통사고라니. 갑자기 찾아든 비보에 머릿속이 멍해져서 잠시 허둥대다가 남편에게 사고 소식을 알렸다. 학과 사무실에도 친정엄마께서 위급하셔서 수업을 못 하게 되었으니 학생들에게 휴강 안내를 해달라 부탁하고 부랴부랴 병원으로 향했다.


막냇동생과 남편이 먼저 도착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응급실 중앙에 있는 침대 위에 눈을 반쯤 감으신 엄마가 누워계셨고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 서 너 명이 엄마의 가슴에다 제세동기를 이용해서 심장에 충격을 주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보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기가 막힌 상황 속에서 맥박을 체크하는 모니터에는 미세한 떨림만 표시될 뿐 아무런 변화가 없자 담당 의사가 우리에게 다가와 어떠한 조치도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 같다며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이별을 고하신단 말인가? 지금 엄마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된 채로 드라마 속 비운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것 같은 엄마 곁으로 다가갔다.


엄마의 얼굴에는 이마와 광대뼈 위에 연지 찍고 곤지 찍은 것처럼 붉은 피멍이 들어있고 머리 밑 시트 위엔 붉은 것들이 어지럽게 묻어 있었다. 식어가는 엄마의 손을 잡는 순간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엄마, 엄마, 우리 엄마”를 부르며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그러다 문득 사람이 죽을 때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있는 기관이 청각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지로 삼키며 아직 살아있을 청각기관을 의지해서 엄마의 귀에 대고 말을 건넸다. 대답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엄... 마!.... 얼.. 마.. 나 아팠어요. 지.. 켜 ... 주지.... 못해... 미.. 안.. 해요. 이젠... 여기... 일... 다... 잊.. 으.. 시고...... 아빠... 계신... 곳에... 가... 셔서... 편히... 쉬세요....”


한 음절 한 음절 전하는 것도 힘들 만큼 울음이 터져버려 세 살 적 더듬더듬 말하던 때로 돌아가 엄마와의 작별 인사를 했다. 옆에 섰던 막냇동생은 발 동동 구르며 울었고 남편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뒤늦게 오빠와 올케가 도착하고 군산에 사는 동생과 제낭이 도착하고 서울 사는 언니와 형부까지 도착해서 비 오는 날 울어대는 개구리들처럼 “엄마” “엄마”를 목 놓아 불러댔다.


목청껏 부르는 우리의 울음소리는 허공에 맴돌았고 엄마는 대답이 없이 오직 “얘들아 이제는 잘 있거라. 나는 간다.”라는 편안한 표정으로 훨훨 날아 이 세상을 떠나가셨다.



<남편의 마음>


맑은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

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장모님은 이미 눈을 뜨지 못하시는 상태였다. 내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이제 잘하려고 했는데.


고3 딸아이 수능 끝나면 장모님을 집으로 모셔오기로 계획하였었는데. 딸아이 수능 보는 날이 이제 한 달 밖에 남지 않았는데. 맑은 하늘의 날벼락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장모님은 우리 때문에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에 눈물 멈출 수 있었다. 네 딸 중 둘째인 우리만 전주에 살고 있기에 우리 집에 자주 오셨고 가끔씩은 시내에 나오셨다가 차 태워 달라 전화하시기도 하셨다.


매달 빠짐없이 드리던 용돈 받으시고는 “매달 이렇게 날 생각해 주니 고맙네”라며 좋아하셨고 어머님 좋아하시던 매생이 갈비탕 사드릴 때마다 내 입맛에 맞고 양도 딱 적당하다며 맛있게 드시면서 “권 서방! 자네 덕분에 정말 고맙게 잘 먹었네” 하셨다.


우리 집에 오시면 우리 집이 당신 집인 양 바쁜 아내를 대신해서 구석구석 쓸고 닦느라 정신없으셨고 여기저기 활동하는 둘째 딸을 자랑스러워하셨으며 아내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오던 시절에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시청 시간을 전하느라 어머니 전화통이 불이 났었다.


지금 생각하니 많이 아쉽고, 나의 어리석음에 눈물 흘리곤 한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아니 더 잘했어야 했는데 왜 그렇게 여유가 없었던지. 지천명(知天命) 나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비겁한 변명을 해본다.


어리석음 씻어내기 위해 후배들에게 말하곤 한다. 장인 장모님께 잘하라고. 대출받아서라도 잘해드리라고. 부모님께 잘하라고. 빚을 내서라도 잘하라고. 장모님 살아생전, 그래도 우리 때문에 조금은 행복하셨으므로 위안 삼고 싶다.





10년 전 친정 엄마의 장례식을 마치고 우리 형제들은 한 주가 멀다 하고 모여서 식사를 했다. 너무나 갑작스레 맞이하게 된 엄마와의 이별이 몹시 충격적이라서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서로를 위로하며 슬픔을 달래는 시간이었다.


그러기를 한 6개월 정도 이어가면서 이일 저 일 정리도 하고 마무리를 하고 나니 각자 어느 정도 정서적인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다. 아마 그때 우리 형제들이 서로 자주 만나지 않았었더라면 힘든 시간이 더 길고 오래갔을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돌아가신지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여러 해가 지나면서 올해는 십 년째 되는 해이다. 사람은 모두 망각의 동물인지라 시간이 갈수록 이젠 엄마를 여읜 슬픔도 옅어져만가는 것 같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엄마 기일에 만날 때마다 우리 형제들은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아무도 자기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것"이라고요. 또한 " 우리 엄마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고생 안 하시고 돌아가신 것이니 참 감사해야 할 일이다"라고.


오늘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나오는 부자 신사가 생각난다. 내일 죽을 사람이 그것도 모르고 값비싼 가죽으로 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신발을 맞추면서 거드름을 피우던 어리석은 부자. 사람은 정말이지 앞날 일어날 일을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이기에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 가장 의미 있고 겸손한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 같다.


얼마 전 티브이에서 나훈나씨가 공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살다 보면 알게 돼 알려주지 않아도

너나 나나 모두 다 어리석다는 것을

살다 보면 알게 돼 알면 웃음이 나지

우리 모두 얼마나 바보처럼 사는지

잠시 왔다 가는 인생 잠시 머물다 갈 세상

백 년도 힘든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


살다 보면 알게 돼 버린다는 의미를

내가 가진 것들이 부질 없다는 것을

살다보면 알게돼 알면 이미 늦어도

그런대로 살만한 세상이라는 것을

잠시 스쳐가는 청춘 훌쩍 가버린 세월

백 년도 힘든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


살다 보면 알게 돼 비운다는 의미를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꿈이었다는 것을

모두 꿈이었다는 것을


우리 부부는 언제부턴가 가끔 차를 타고 가면서 "공"이라는 노래를 부른다. "공"을 부르고 나서 "백 년도 힘든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 살아가는 어리석은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얘기하곤 한다. "공"을 부르고 나서 "너무 쌓으려고만 하지 말고 하나하나 내려놓으며 살아가자"고 얘기한다.


젊은 시절의 청춘들이야 아직은 이루어내야 할 과업을 열심히 이루어 가야 하겠지만 각자가 정점을 찍은 나이가 되고나서 부터는 서서히 서.서.히. 내려가는 인생길임을 알고 살아가면 좋겠다.





시집올 때 친정엄마가 봄 이불 여름이불 겨울이불 철철이 바꿔가며 덮으라고 여러 채의 이불을 해주셨다. 그중에는 간절기에 덮는 연한 분홍색으로 된 솜 이불이 있었는데 하도 여러 해 덮다 보니 이불 가장자리가 낡아서 그만 버려야지 하면서도 버리지 못했다.


그러다 2018년 퀼트 작가 전시회 때 아플리케 기법을 활용해서 친정 엄마가 해주셨던 이불을 리폼해서 전시하게 되었다. 오래전 부터 관심있었던 이불 리폼을 직접 실현해 보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낡은 이불을 리폼하면서 엄마가 해주셨던 그 당시의 연분홍 느낌을 최대한 살려서 아플리케 조각과 함께 이어붙였다. 이불의 제목은 Missing Mam으로 붙였다.


친정엄마가 해주신 이불을 리폼한 이후로는 이른 봄이나 초가을이 되면 Missing Mam 이불을 덮어본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Missing Mam 이불은 덮을 때마다 엄마의 마음을 덮는 것 같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엄마의 추도일에 다 같이 모이지 못하고 각자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공무원인 동생이 코로나 비상이 걸리는 바람에 오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로 조심하자는 차원에서 만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 보기로 했다.


오전부터 친정 공창에는 엄마와 함께 했던 사진들을 올리고 오늘 각자의 집에서 엄마를 추억하는 시간에 함께 공유했으면 좋을 성경 구절과 찬송가가 올라왔다. 언택트 시대를 맞이하다 보니 이런 추도예배를 드리는 날도 맞이하게 되는가 보다.


코로나가 정말이지 우리 삶의 깊숙한 곳까지 알게 모르게 많은 제약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 사는 언니는 직장에서 휴가까지 미리 잡아놨는데 못 오게 되었다며 무척 아쉬워했다. 올해가 엄마 추모 10주기라서 더욱 아쉽다고 한다.


오늘은 아침부터 Missing Mam 이불을 꺼내서 침대 위에 펼쳐놓았다. 요즘 갑자기 추워져서 따뜻한 이불이 좋기도 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날이라서 살아생전의 엄마를 생각을 하며 한 컷 한 컷 사진을 찍었다.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늘 성경 책을 가까이하셨고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엄마이기 때문에 Missing Mam 이불 안에는 특별히 Bible을 새겨 넣었는데 그 조각이 오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왔다.




오늘만큼은 엄마가 끼시던 반지를 끼고 지내보려고 보석함 속에서 잠자던 엄마의 반지도 꺼냈다. 엄마의 보석들은 많지 않았지만 우리 형제자매들이 하나씩은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


그중에서 나에게로 온 것은 보랏빛 사연을 담고 있는 자수정 반지다. 친정아버지께서 엄마에게 맞춰주셨던 반지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자수정에 흠집이 많이 나있다. 엄마는 이걸 끼고 설거지도 하시고 반찬도 만드시고 그랬던 모양다.


오늘 저녁에는 형제들과 함께하는 카톡 공창이 떠들썩거릴 듯하다. 추도일에 직접 만나지 못했으니 랜선 추도예배라도 드리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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