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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원도감자 Aug 29. 2024

국제연애 잔혹사 1편

우리 제발 만나게 해 주세요

다음 화는 무얼 써볼까 하다 국제연애에서 오는 어려움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챕터를 나누어 써보겠다. 1편은 물리적인 거리에서 오는 서러움이다.




 아마 대부분의 국제 커플들이 영화나 드라마 뺨치는 첫 만남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 연애의 시작도 그랬다.

2019년 1월 우연히 조계사 근처 골목길에서 마주쳐 시선을 교환했다.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는 가족들과 한국 여행 중이었지만 제주도에 가지 않고 혼자 서울에 남아 나와 시간을 보냈다. 네가 대만남자고 내가 한국여자고 이런 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의 대학은 2월 중순에 개강을 앞뒀다. 우리는 둘 다 대학생이었고 나는 주말에 과외도 해야 했다. 다음 만남은 5월 연휴나 종강 후에나 가능하다 생각했다.

2월에 타오위안 공항에서 나를 배웅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너를 만나러 갈 거야. 금요일 오전에 강의가 끝나자마자 한국에 갈게.


현실성이 없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그가 모범생이라는 건 묻지 않아도 그간의 대화를 통해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나 또한 그랬다. 대만에서 한국까지의 비행시간은 2시간 반, 그의 학교에서 타이베이 공항까지는 1시간, 인천에서 나의 서울 자취방까지는 1시간 반.

우리의 만남은 왕복 10시간짜리 만남이었다. 학기 중 그를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 생각했다.


그가 개강한 주 금요일이었다. 오후 1시쯤 문자가 왔다.

나 지금 공항 가는 길이야!
오잉 왜?
내가 간다고 했잖아!

응?


그리고 그는 한국에 허구한 날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가 출국장에서 6시 반 이후에 나올 때는 내가 공항에 마중 나가 있을 수 있었다. 그에게 온다는 연락이 오면 금요일 마지막 강의를 듣는지 마는지도 모르게 앉아있다. 인천공항으로 튀어나갔다.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 그때 느껴보았다.

‘두세 달 지나면 갑자기 안 올 수도 있어’ 생각하며 서글퍼졌던 내가 무색하게 그는 주구장창 왔다.

그가 3주 연속으로 왔을 때는 친구가 네 남자친구 대학 다니는 거 맞냐며 확인해 보라 했다. 듣고 웃었는데 친구는 웃지 않았다. 진심이었다.


그는 실크로드 횡단을 하고자 모았던 돈으로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비행기 값이 한두 푼이 아니니 한국에서 먹고 놀며 쓰는 돈은 내가 다 부담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엔 대만보이답게 남자가 커피값도 아니고 밥값을 여자한테 내게 하는 건 좀 이상해 라며 거부했지만 그렇게 단호했던 것 치고는 빠른 시간 내에 수긍하여 내가 사주는 밥을 되게 잘 그리고 많이 먹었다.

난 그에게 평소 내가 한 끼를 때우는 그저 그런 음식을 먹이긴 싫었다. 원래 하던 수학과외에 더해 과탐 과외를 하나 더 잡았다.


 그가 한국에 있을 때면 시간이 아까워 우리는 잠도 조금 잤다. 2박 3일간 그렇게 많이 말하는데 목이 안 쉬는 게 신기하다는 내 말에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우리 아빠 유전이야. 우리 아빠는 엄마한테 말 더 많아!

 나는 그가 한국에 왔어도 토요일에 1시간 반은 과외를 하러 가야 했다. 슬펐지만 돈 벌어서 남자친구 간장게장 먹여야 했다! 게다가 그는 2인분부터 시작한다. 남자친구는 서운할만한데도 나에게 한 번도 뭐라 하지 않고 과외 학생 집 근처 카페에서 공부하며 나를 기다려줬다.

한 번은 내가 시험기간 3주 전이니 이번달은 그만 오라고 했더니 그가 삐졌다. 옆에서 같이 공부하면 되잖아! 삐진 남자 달래기란 생각보다 어려웠다.

 

 전공공부와 과외로 바쁘게 살며 녹초가 되었지만 그 와중에도 그가 보고 싶었다. 분명히 정신적으론 그리 힘들지 않았는데 희한하게 코피는 났다. 재수 때도 안 나던 코피가 나다니! 엄마 약국에서 영양제를 잔뜩 받아왔다. 주중엔 매일 영상통화를 하다 잠들었는데 그도 주말에 48시간의 한국 방문으로 인한 피로가 주중까지 가는지 매일밤 나와 같이 곯아떨어졌다.


 어느 가을날 그가 인천공항에서부터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더니 밤에 자다 깨서 끙끙 앓기 시작했다. 병원에 갈 때만 해도 몸살인 줄 알았는데...


혹시 남자친구가 잠 못 자고 일해요?

의사가 의아한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대상포진은 19살이 걸리는 병이 아니에요. 이렇게 젊은 사람이 걸리는 건 극도의 스트레스나 과로 때문인데..

여자친구 한번 만나려다 대상포진에 걸리다니.. 국제연애 참 쉽지 않다.


 이따 뭐 해?라는 질문에 동기들이 남자친구 보러 간다고 할 때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보고 싶을 때 보러 갈 수 있구나. 부러웠다.

하루는 카페 옆자리에서 여자가 남자친구에게 투정을 부렸다. 맨날 보고 싶은데 너 왜 이렇게 멀리 살아! 달래주는 걸 엿들으니 남자는 용인에 살고 있었다.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대학생인 우리에겐 방학이 있었다. 방학은 오랫동안 함께일 수 있었다. 천국이었다. 그의 가족들과도 시간을 보냈다. 그가 왜 이리 다정하나 했더니 부모님을 닮은 것이었다. 나를 너무 예뻐해 주셨다. 강아지도 나를 반겼다.

그는 우리 부모님께 살갑게 굴었다. 우리 아빠는 걸을 때 꼭 남자친구에게 야무지게 팔짱을 껴서 엄마가 남자친구 뺏겼다고 나를 놀렸다. 팔짱 낀 두 남자의 뒷모습은 몇 년간 내 휴대폰 배경화면이었다.


2020년 1월. 1주년을 기념하며 우리는 올해도 힘내자 했다.

그가 말했다. 대만에서 2020520은 사랑해 사랑해 너를 사랑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날이야. 5월 20일 날은 한국에서 꼭 함께하자. 달력을 보니 주중이었다. 주중인데 못 오겠지!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오겠다 했다. 나는 에이~ 하면서도 그가 약속을 지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하늘길이 막혔다.


대만이 20년 3월에 90일 무비자 입국을 중단했다. 한국도 바로 국경문을 닫았다. 어? 그럼 이제 우리 못 봐?

무슨 상황인지 실감이 잘 안 됐다. 얼떨떨했다.

이 전염병 따위가 우리를 갈라놓는다고?




 충격이 한번 가시자 우리는 침착해지려 노력했다. 이참에 서로 전공 공부나 가외의 하고 싶었던 공부를 마음껏 하며 발전하는 시간으로 삼자고 했다.

사이버 연애는 생각보다 할만했다. 영상통화가 발명된 시대에 사니 얼마나 다행인가. 매일 얼굴 보며 수다를 떨 수 있었다. 5월 20일 날은 영상통화로 케이크에 초를 불었다.


 모든 세상이 멈춘 이 시기에 뭘 할까 하다가 일단 돈을 모아야겠다 생각했다. 1년간 서로의 나라를 오가며 뼈저리게 깨달은 게 있었다. 국제장거리 연애는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든다.


코로나 시기엔 과외자리가 많았다. 여기나 저기나 상황은 비슷했다. 그는 코딩과외와 영어과외를 하며 가끔은 cf 촬영 알바를 나갔다. 나도 과탐 단기과외를 늘렸다. 방역수칙에 따라 1m 이상 떨어져 창문을 열고 마스크 착용 후 수업하다 보니 과외시간에 그전보다 큰 소리를 냈다. 그 시기엔 항상 목이 아팠다. 하지만 처음으로 통장잔고에서 천만 원이 찍힌 것을 보았다. 천만 원 단위의 돈이 내 통장에 있는 게 신기했다.

남자친구가 아니었다면 그 시기를 멍하니만 보냈을 것이다.  


그러다 그가 20년 8월에 한국에 들어왔다. 그가 전년부터 준비한 교환학생이 된 것이었다. 나는 그가 한국에 들어온다는 걸 정말 며칠 전에 알았다. 교환학생을 준비하는지도 몰랐다. 그는 나에게 간다고 말했다가 만약 취소되면 내가 너무 실망할까 봐 말을 못 했다고 했다.

2주간의 자가격리 끝에 우리는 만났고 이 시국에 한 땅에 있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소중함을 알았기에 더욱 잘해줬다. 교환학생 와서 비대면 수업만 들은 불쌍한 남자친구여... 사랑에 눈이 멀었었구나...


 21년 1월 말 그가 떠났다. 쿨한 모습으로 그를 보내줬다. 우리 운 좋게 함께했으니 이 기억으로 1년은 거뜬히 견딜 수 있어! 서로 씩씩한 척 다했다.

 하지만 그가 간지 얼마되지 않아 길을 지나다니는 커플들이 손잡는 것만 봐도 남자친구 얼굴이 동동 떠올랐다. 마음이 힘들었다. 4월의 어느 날 그와 영상통화를 하는데 그날따라 유독 그리웠다. 문득 칭얼대고 싶었다.

 3개월밖에 안 지났는데 이렇게까지 보고 싶을 줄 몰랐어. 저번에는 7개월 만에 만났는데도 힘들진 않았는데 이번에는 왜 벌써부터 힘든 걸까?

그가 많이 힘드냐고 물어보더니 갑자기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지도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징징대는 게 실망스러웠나? 이름을 불렀다.

구마야! 구마야! ( tmi지만 남자친구 애칭이 고구마다..) 그때 갑자기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헙.. 끅.. 흡.... 흐읍.. 끅..

그가 울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통마저 아예 화면 밖으로 사라져 울었다.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이건 나중에 내가 요긴하게 놀렸는데 아무튼 그때는 나도 감정이 북받쳐 같이 펑펑 울었다.


 그때는 왜 3개월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그리 힘든 감정이 몰려왔었을까? 아마 우리의 이별이 앞으로 굉장히 길어질 것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21년 5월 중순에 대만이 입국제한계획을 정식 발표해 올해는 외국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할것이라 단호히 선언했다.

백신 접종 후에 만날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확신자가 늘어나니 국경문을 더 단단히 걸어 잠갔다.

제외 외국인이 있었는데 외국인 배우자나 자녀, 대만 유학생이었다. 난 그의 배우자가 아니었다. 연인은 아무 자격이 없었다.

한국의 상황도 같았다. 주변에서 22년 여름까지는 닫혀있을 거란 얘기를 했다.


엄마와 통화 중 내가 말했다.

엄마, 근데 만약에 지금 대만에 배우자 비자로 들어가는 외국인 배우자들이랑 나랑 사랑하는 마음의 크기로 줄 세우잖아? 그럼 내가 제일 앞일 거 같아.

엄마는 말했다.

사랑 안 해도 부부는 부부야. 법적으로 엮인 건 막강한 거야. 불만있음 결혼하든가ㅋ



여름방학 기간에 만나는 건 불가능했다. 백신 2차 접종은 필수였고 남자친구는 8월 말에 2차 접종이 예정되어 있었다.

한국 정부에서 9월에 외국인 입국을 받겠다 했지만 한국에선 2주간 시설격리를 해야 하기에 9월 중순에 개강하는 남자친구가 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만에 돌아가서도 자가격리를 해야했다.)


그럼 우린 학기 끝나는 22년 1월까지 못 봐?

..


우리는 성숙한 커플인 척하다 어느 순간에 솔직해졌다.


보고 싶어! 봐야겠어!

한국 대만 둘 중 어느 곳도 아닌 제3 국에서 만나자는 계획을 세웠다. 후보지는 입국 후 자가격리가 없는 지역이었다.

다음 학기 기간은 나는 9월 초~12월 하순이었고 남자친구는 9월 중순~다음 해 1월 중순까지였다.

학기 중 만나려면 만나는 동안 강의는 결석해야 했다. 나는 그가 FM 스타일의 모범생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냥 우리 며칠 결석하는 건 감수하고 3일만이라도 만나면 안 될까? 각자 나라에 돌아간 후 자가격리 할 때는 비대면 강의만 듣자.

나는 듣자마자 바로 그러자 했다. 지금 생각나면 둘 다 정신이 나갔다. 엄마한테 말하면 등짝스매싱을 피할 수 없겠다.

강의는 빠져도 시험은 봐야 했기에 시험기간만 피해 계획을 세웠다.

그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일이 틀어지면 그 학기를 날려도 괜찮다는 마음이었다.


진에어 티켓을 끊었다. 이틀 만에 항공편이 취소됐다는 연락이 왔다. 날짜를 늦춰 티웨이로 다시 끊었다. 2021년 10월 6일 밤 비행기. 괌으로 가는 비행기였다.

비행기표를 끊고 한 달이나 지나도록 잠잠했기에 이뤄질 줄 알았다.  

9월 29일 티웨이항공에서 전화가 왔다. 비행기가 취소되었고 언제 상황이 나아질지 모르겠다. 며칠 뒤 비행 스케줄로 잡아 줄 수 있지만 그마저도 취소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안전하게 12월 티켓을 끊고 12월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남자친구에게 알리자 그는 혹시 눈물이 나면 혼자 울지 말고 전화 걸어서 울라고 했다. 느끼하다고 웃고 전화를 끊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난 원래 1년에 한 번 울까 말까 하는 사람이었는데.. 연애를 시작하고 이렇게 눈물이 많아지다니...


10월 초순의 어느 날 푸켓이 11월 1일부터 자가격리가 면제된다는 기사가 떴다. 다시 한번 도전했다. 11월 말 푸켓행이었다.

모든 걸 체크했다. 그래 우리는 교차 접종자도 아니니 백신 조건도 충족하고, 이것도 충족하고, 저것도 충족하고... 그렇지만 그는 또 취소될까봐 불안했던 것 같다.


푸켓 얘기 하던 중 그가 대뜸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말이 있다고 운을 떼길래 혹시 헤어지자는 건가 쫄았다.

그런데 그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했다.

감자야 코로나가 끝나더라도 또 이런 재난상황이 없을 거라는 보장이 있어? 우리가 결혼하면 법적인 자격이 생겨. 혼인신고서 한 장이면... 난 연인으로든 부부로든 어차피 너랑 평생을 함께할 거야. 널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 인생에 여자는 너 하나뿐이다 확신했어.


내가 말했다.

구마야... 나도 네가 내 인생의 유일한 the one 이야. 하지만... 정신 차려 이 자식아...




한달동안 항공사에서 연락이 없어 방심하고 있었다.

11월 3일 남자친구의 비행기표가 취소됐다는 연락이 왔다. 괌행 취소 연락도 수요일에 왔는데 이번에도 그러네.. 수요일이 불운이 꼈나 싶었다.

남자친구는 나에게 내 티켓은 취소하지 말라고 했다. 다시 상황이 바뀔 수도 있고 자기가 제4국을 통해 경유해서 푸켓에 들어갈 방법을 알아보겠다 했다. 11월 8일 아시아나에서 메일이 왔다. 나의 비행기표도 취소되었다고.

하늘이 우리를 버리는 것 같았다.


싱가포르 경유 자카르타행 티켓을 끊었다. 취소 전화를 받았다. 이제 익숙했다.


22년 1월 우리는 괌에서 만났다. 361일 만의 재회였다.




이 브런치 글을 쓰며 혼자 놀랐다. 일기를 보지 않아도 몇몇 날짜들이 정확히 떠오르는걸 보니 정말 간절했구나 싶다.


혹시나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중에 우리와 같은 경험을 한 국제커플이 있다면 고생 많으셨다는 말을 하고 싶다.


존버는 승리한다!


열심히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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