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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빈 Jan 04. 2019

정체성의 역사, 말콤 엑스

영화 <말콤 엑스> (Malcolm X, 1992)

인간이 인간을 매매하던 노예제는 끝났다. 아메리카로 이주한 흑인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고, 그들은 미국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길 요구받는다. 그러나 과연 미국 사회는 그들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들은 뉴욕과 보스턴의 빈민가를 채워갔다. ‘할렘’은 노예 해방 이후 흑인들의 대표 거주지로서 자리 잡았다. 이는 흑인의 해방이 결과적으로 백인에 의해 ‘해방당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흑인들은 여전히 인종차별에 시름해야 했으며, 폭력적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살해 협박과 방화를 일삼았다. 노예주의 채찍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미국 사회라는 노예주는 존재한 상황이었다. 


말콤 엑스는 이런 미국 사회에 흑인들의 분리 독립을 주장한 사상가이다. 영화 <말콤 엑스>  (Malcolm X, 1992)는 이런 말콤 엑스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 영화이기도 하다. 역시 흑인의 분리를 요구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끊임없이 백인들의 폭력에 시달리는 유년시절. 결국 그의 아버지는 그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후 가난에 시달리다 백인에게 강제로 입양당했지만, 그곳에서도 ‘깜둥이’로 차별받았다.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소년 말콤에게 선생님은 ‘흑인은 변호사가 될 수 없다. 목수가 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친절한 목소리로 설명한다. 여전히 흑인에겐 직업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



근대 인류의 이성은 비인간적인 노예제도는 없애고자 최대한 노력했다. 그러나 여전히 차별의식은 여전히 남아있다. 미국 사회에서 유색인종(colored)은 백인과 법적으로는 같은 위치에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백인은 그들을 구분했고 분리시켰다. 영화에서도 꾸준히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같은 절도범죄 혐의였음에도 백인 소피아는 2년형에 불과한 반면, 흑인 말콤과 쇼티는 14개 항목 모두 8~10년형을 구형받는 장면은 ‘유색유죄, 무색무죄’를 보여준 대표적 장면이다.


이 상황 속에서 흑인들은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미국 사회에서 초대받지 못한 손님들이 독립과 전복을 외치는 것이 그렇게까지 이상한가? 푸른 눈의 금발 백인 예수를 믿으라 요구하는 기독교의 품보다는, 오히려 같은 유색인종의 종교인 이슬람의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모습이 더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들은 자발적으로 미국을 선택하지 않았다. 심지어 노예에서 해방되는 과정마저 '백인 대통령'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말콤의 주장은 미국 사회에서 언젠가는 답해야 하는 질문이었다고 본다. 피해자 흑인과 가해자 백인은 과연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을까. 


영화 속에서 그의 연설에 감명받은 백인 대학생이 ‘노예제 이후에 태어난 자신이 흑인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 장면 역시 미국 사회가 풀어내야 할 문제다. 선조의 원죄를 후손에게 물을 순 없다. 그러나 그들 역시 선조의 원죄로 만든 혜택 속에서 태어났다. 피해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은 어떻게 투쟁에 결합할 수 있을까. 젊은 말콤의 대답은 “Nothing(아무것도 없다)”였다. 백인의 원죄를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것이 공존을 위한 정답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가해자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은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 것일까. 지금의 우리는 “그럼에도 피해자의 말을 최대한 들어주고, 피해자의 입장에 서도록 해 보자” 정도의 답안 정도를 내놓았다.


보스톤대학교에서 연설 후 백인 대학생을 거절하는 말콤 엑스 (영화 스틸컷)


말콤 엑스의 삶은 흑인의 민권운동을 대표하지만, 동시에 비단 민권운동뿐 아니라 모든 사회운동에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의 말로 역시 사회운동의 모순을 보여준다는 점이 씁쓸하게 느껴진다. 그는 그가 담고 있는 조직(네이션즈 오브 이슬람)의 수장의 비리를 직면했고, 이에 노선을 변경하게 된다. 그러자 기존에 있었던 조직의 구성원에게 미움을 샀고, 결국 그들에 의해 암살당한다. 흑인은 아름다우며 흑인이 위대하다고 주장한 그의 삶임에도 결국 동료 흑인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조직의 자멸로 사라진 사회 운동이 얼마나 많았는가. 역사의 비극은 왜 항상 반복되는지 싶은 생각만 든다.


<말콤 엑스>의 플레이타임은 3시간이 넘는다. 분명히 짧다고는 할 수 없는 길이의 영화다. 말콤의 어린 시절부터 거친 갱단에서의 생활, 그리고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목사로 거듭나는 과정을 모두 담아낸 호흡은 절대로 짧지 않다. 그러나 그 장면들이 무의미하다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어린 시절과 청년시절은 그의 사상을 강화하는 동기였고, 범죄와 백인에 대한 갈망을 천천히 보여주었기에 그의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도드라진다. 그것이 비단 그의 정체성만이었을까. 할렘에서 자라고 사회에서 버려진 아프로-아메리칸들이 모두 그러하지 않았나.


말콤은 영화 내내 미국 사회 안에서 그의 흑인 정체성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영화 역시 3시간을 거쳐 미국 안에서 흑인 사회가 가질 수밖에 없는 정체성을 열심히 설명한다. 물론 말콤의 시대와 지금은 다르다. 노예무역으로 시작된 미국 내의 비극적 인종주의는, 노예 해방과 그의 투쟁을 거쳐 ‘흑인 대통령’이라는 상징을 만들었다. 그 상징이 끝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하나의 시작은 분명하다. 더 이상 미국의 주인은 백인만이 아니다. 흑인, 유색인종 모두 미국의 주인이다. 


올 해로 미국은 트럼프의 시대를 2년째 겪고 있다. 고비가 될 것으로 보였던 중간선거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이 서로 절반의 승리를 가져갔다. '흑인 대통령' 이후 미국의 백인들은 강력한 백래시로서 트럼프의 시대를 열었다. 말콤의 삶이 아직까지 울림을 갖는 것은, 결국 현재 우리가 내쉬는 한숨에 기인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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