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는 일부러 느리게 복제된다

천천히 가는 것이, 오히려 정교한 선택일 수 있다.

by 서하

DNA 복제가 느린 것은 단점이 아니라 '의도된 설계'이다.


우리 몸속 세포는 하루에 수천만 번 이상 복제되고,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DNA를 똑같이 복제하는 일이다.

DNA는 우리 몸의 모든 기능을 조절하는 설계도이자 청사진이기 때문에

복제 과정에서 한 치의 오차 없이 전달되어야 한다.


이를 담당하는 효소가 'DNA 중합효소(DNA polymerase)'이다.

이 효소는 DNA의 가닥을 따라 염기를 하나씩 복사한다.

그 과정에서, '복제 → 검토 → 교정'의 과정을 반복하며 굉장히 느린 속도로 작동한다.

한 번 염기를 붙이면, 바로 다음으로 가지 않고 잠시 멈춘다.

'이게 지금 맞는 염기인가?'

'반대편 염기와 수소결합이 정확히 맞는가?'

위와 같은 질문을 계속하고 확인하고 나서야 다음으로 넘어간다.

만약 오류가 생기면 그 즉시, 오류가 난 염기를 잘라내고 다시 맞는 염기를 붙인다.


이 과정을 반복하는 덕분에, DNA 복제의 정확도는 10억 개 중에 하나 오류가 날까 말까 한 수준이다.

이런 점검 없이 빠르게 복제가 되면, 암세포나 선천성 질환, 세포 기능 저하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즉, DNA 복제는 일부러 속도를 늦춰 치명적인 실수를 방지하는 생명의 자동 안전장치인 것이다.




이건 단지 분자 생물학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삶을 설계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예전에 간 일본 후쿠오카 여행이 떠오른다.

과거의 나는 여행을 계획할 때에 효율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고

바쁘게, 촘촘하게, 꽉꽉 채워서 여행지를 누비는 편이었다.

시간을 최대한 아껴 쓰는 것이 '잘 노는 법'이라고 믿었다.

근데, 엄마와 갔던 후쿠오카 여행에서 유후인에서 벳부로 넘어가며

시간을 맞추랴, 맛집에 줄 서랴, 지도 앱 오류로 한참 길을 돌아가기도 하고, 일정이 엉망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엉망이라고 생각했던 날이 굉장히 기억에 남았다.

시간을 놓쳐, 길을 걷다 만나게 된 고즈넉한 초록빛 가득한 카페

햇빛이 부서지던 길가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전경, 우연히 만난 노을 지는 예쁜 풍경

그날은 효율적이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느슨했던 시간이 나에게 행복을 주었다.




살다 보면 자꾸 서두르게 된다.

비단, 여행뿐만 아니라

사람을 만나는 속도, 결정을 내리는 타이밍, 목표를 향해 가는 발걸음까지

빠른 게 더 효율적이고 유능한 것이라는 환상에 휩쓸릴 때가 있다.

하지만, DNA는 말해준다.

살아남고, 제대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천천히'가 기본값이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여행을 계획할 때에도 가장 가고 싶은 한두 곳만 넣는다.

지도를 보며 무작정 걷기도 하고, 우연히 만난 카페에 들어가 멍하니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한다.

계획이 틀어지면 잠시 멈춰 앉아 햇빛을 받으며 그 순간을 즐겨보고자 한다.


그 시간들이 내 안에 실수 없이 쌓여가는 '복제의 순간'이라고 믿는다.

DNA가 그렇게 천천히 나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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