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경계 생활 #1 | 그것은 수난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수난에서 시작되었다.
회사의 오너와 건물주, 병원에 헌납하기 위한 삶을 청산하고 나만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과 이대로 시간을 보내면 절벽 아래로 떨어질 뿐이라는 두려움, 더는 버틸 힘조차 없다는 괴로움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고향 부산으로 내려와서 이전에는 하지 않았던 공간대여업, 즉 공유서재이자 북카페를 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생의 어떤 순간에는 승부를 걸어야 하는 때가 있고, 나는 바로 2023년 말이 그때라고 생각했다. 더는 안 되겠다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극심한 아토피를 앓았고 덕분에 눈을 잃었다. 축구선수, 작곡가, 디자이너의 꿈을 차례로 포기하고 단지 건강하게 살아남는 데만 골몰한 20대였다. 30대가 되어 우여곡절 끝에 서울로 상경했고 기획자로 일을 했다가 다시 눈수술을 하고 제주와 대전을 오갔다가 다시 서울에서 일, 다시 회사가 인수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누구나 인생의 곡절은 겪는 법이라지만 어째서인지 좀처럼 생활이 안정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에서는 들어간 지 3개월 만에 회사가 인수되고, 전임 대표는 나몰라라 하고, 또다시 뻥 뚫린 공백기를 여러모로 지우고 메워가며 이직이자 구직 활동을 했던 터였다. 2월부터 9월. 그 긴 시간 동안 우아한 형제들을 비롯해 여러 회사에서 최종문턱에서 떨어지거나 이직을 포기하거나 잘못된 곳에 이직을 하며 심적 고통만 더 하던 순간에 나는 알았다.
남들처럼 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결심했다. 방황하지 않고 반항하기로.
언젠가 네이버 블로그에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제목은 <반항하는 인간>. 그것은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는 바닥으로 추락한 사람이 쓴 절규의 목소리이자 비망록이었다. 2020년이었을까. 양쪽에서 두들겨 맞고 온갖 설움 받친 목소리는 다 들어주면서도 정작 내 안에서 썩어 들어가는 마음은 위로받기는커녕 이해받지도 못했을 무렵, 스스로에게 한 다짐의 일부였다. 더는 휘둘리지 않고 내가 휘두르겠다는.
그리하여 이를 악물고 일했고 2022년까지 일을 하고 그만두었다. 1년간 이직 준비까지 하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태연한 척 굴었고 실제로 그런 마인드로 대했으니까. 다만 마음 한 편에 '반항'을 두었다. 이것을 언젠가는 '사랑'으로 바꿀 수 있으려면 바뀌지 않는 현실을 탓할 게 아니라 나에게 맞는 현실로 나아갈 필요가 있었다.
그런 후의 이직이었으니 새롭게 열정을 쏟으며 일해야겠다 다짐할 만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3개월 만에 회사가 팔려갈 줄을.
나는 매번 원점으로 돌아왔다. 초등학교 때 계속해서 전학하며 친구들과의 관계가 원점으로 돌아갔고, 요양과 치료를 반복하면서 그간 했던 일이 수포로 돌아갔기에 원점으로 돌아갔고, 번아웃이 올 정도로 갈아 넣는 회사에 갈림을 당하는 일을 견뎌야 한다 했으니 모든 게 망가져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 처음이라는 장소. 무언가 열심히 했는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느낌은 나를 패배의 올가미에 덧씌우기 충분했다.
방황이었다. 짙은 방황. 강원도 아토피와 2차 감염, 면역억제제와 합병증으로 강원도 홍천에서 요양하고 경북 어떤 사찰에서 요양하다가 돌아와도 '다시 하면 된다'라고 생각했다. 학교를 6개월 다니고 6개월 휴학하며 치료받을 때도 '언제든 기회는 있다'라고 여겼다. 그러나 마흔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끝없는 추락은 전의를 상실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때마침 사촌들이 하나둘 죽어가기도 했고.
북카페이자 공유서재 <몰경계 沒經界>의 시작은 그 무렵이었다. 몰입, 몰수, 몰염치라고 할 때 쓰이는 '전혀 없음'이라는 뜻의 몰沒. 경계가 전혀 없음을 뜻하는 몰경계에는 더 이상 세상의 풍파와 운명의 장난에 속박당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더 이상 네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겠다.'라는 다짐이었다고 할까.
물론 공간의 운영이 마음처럼 되는 일은 아니었다. 철저한 사전조사와 시장조사, 입지와 적합한 비즈니스의 구현, 효율적인 운영 방식 등이 잘 버무려져야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감성으로 잘 되는 일은 없듯이 우리 일도 마찬가지였다. 철저함에 완벽함만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시작을 말하는 이유는 '가치관'이 시작이자 끝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왜 살아가는가? 그저 돈 벌기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좋은 사람 만나서 가정을 꾸리려고? 무엇이든 이유는 되지만 그 이유, 시작의 이유가 중요하다. 나에게도 많이 물었다. 물경계인지 몰경계인지 그건 뭐고 이건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사실 작은 소품 하나하나, 공간의 배치와 색상의 선택, 조명의 밝기와 크기, 음악의 감도 등은 모두 그런 생각에서 뻗어나간다. 말하자면 중심인 것이다.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은 그 가치관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그것만이 중요하다.
번아웃과 생활의 부침, 도시의 소음과 과도한 경쟁. 수많은 관계에서 오는 피로 등에서 해방되는 공간이고 싶었다. 그 속에서 다양한 종류의 책을 접하고, 우리가 준비한 향과 차, 음악을 들으며 새로운 감각을 일깨워보는 시간. 이 공간을 나서면 다시 나의 생활로 돌아갈 텐데 그때 나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면 좋을까 한 번쯤 생각해보게 하는 공간. 심신을 이완시키고 색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공간. 그것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그때의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몰경계(언리밋북스) : https://www.instagram.com/space_un.limi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