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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르고운 Aug 01. 2024

호접몽(胡蝶夢)

  엊그제는 그녀의 기일(忌日)이었다. 동아리 모임 날이어서 회원들과 점심을 먹고 있는데 작은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빠, 뭐 해?” “점심 먹고 있다.” “오늘 엄마 기일인데….” “알고 있다.” “알았어.” 엄마 기일이니 함께 추모원에 가자는 전화였다. 내 대답은 가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고 딸은 그러는 내게 서운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꿈에 보이는 빈도가 줄었듯이 내게서 아내의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일까 생각해 보지만, 그런 건 아니다. 계량할 방법이 없으니 흐른 세월의 길이에 반비례하여 줄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밖에.


  내 인생의 전반 30년을 함께 살다가 후반부 가운데 16년을 통째로 가져간 그녀다. 처음엔 어떻게든 낫게 해 보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다 불치의 병이라는 걸 알고는 가엾어서 옆을 비울 수 없었다. 신의 저주에 걸린 듯, 소뇌(小腦) 세포가 죽고 척수에 흐르는 뇌간까지 말라버려 몸이 비틀어지고 머리 아래 감각을 모두 잃는 ‘소뇌위축증’이었다. 원인도 치료 방법도 밝혀진 게 없는 질병으로 7~8년 정도 살 수 있다고 했는데 16년을 버텼다.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 마지막 편에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녔다는 호접몽 이야기가 적혀있다. 나비로 날아다니며 자기가 장자인걸 알지 못했다. 그러다 꿈에서 깨어보니 장자였다. 장자는 자기가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장자가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한 마리 나비와 장자, 같은 세상에 같은 생명으로 잠시 머무는 존재로 굳이 구분할 일이 있느냐는 물음과 답이 적혀있는 글이다.



  어쩌다 만났던 아내와 나는 잠시 인연으로 46년을 함께 살았다. 사랑과 미움이 엇갈린 삶에 부대끼고 견디며 숱한 일들을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정말 순간이었다. 아이들을 키우고 가진 것 없이 세상 시련에 앙버티며 몸 성하게 같이 산 30년, 약을 찾고 치료를 해보겠다고 발싸심했던 5년, 그리고 점점 뒤틀려가는 모습을 지키며 안쓰러워했던 10여 년이 모두 찰나였다.


  그 시간 가운데 그 16년은 그녀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헛짓이 되었다. 오랜 이별 연습에 슬픔이 조금 덜했다고 생각했지만, 외려 그로 인해 슬픔이 아픔으로 변해 무시로 날 울렸다. 곱고 성한 모습으로 보내지 못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흙으로 돌아갈 육신이 곱건 뒤 틀렸건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생각이 날 때마다 그게 마음에 걸린다. 이 우주의 원소로 돌아갔지만, 함께 살던 육신의 시간이 그리워서일까?.


  장자가 한 마리 호랑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녔던 꿈처럼 지난 내 시간의 아픔도 그저 한낱 꿈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흘러간 시간은 모두 같은 단위의 시간이다. 좋았던 시간이나 아팠던 시간이 다르지 않은 것인데도 미련을 두는 게 덜 익은 마음 탓일까? 세상 만물은 모두 우주의 순리에 따라 생성하고 소멸하며 흘러가는 것. 어쩌다가 잠시 형체를 갖추는 순간을 우리는 일생이라는 이름으로 거룩하게 생각한다. 나름으로 생멸(生滅)의 이치를 짐작하면서도 세상에 깊이 내린 내 인식의 뿌리는 너무 작고 좁아 늘 휘둘린다.


  80년 가까운 시간을 허비하며 겨우 알아낸 세상 이치를 작은 감정의 흔들림에 부숴버리고 만다. 그 옛날 사람인 장자가 이미 간파한 우주 만상(萬象)의 원리를 오늘에도 깨우치지 못해 온통 헤매는 이 아둔함은 죽어서나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처음에 아내를 보내고는 거의 매일 자전거를 타고 산길을 넘어 아내의 육신이 산화하고 남은 재가 담긴 백자 항아리를 보러 다녔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그 하얀 항아리가 담고 있는 의미가 공허하게 다가왔다. 그것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내 외로움을 더 짙은 색으로 덧칠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누구나 가는 길을 조금 먼저 떠났을 뿐, 아파할 일도 아니었다.


  이제 점점 내 꿈을 엿보는 횟수가 줄어드는 그녀가 때론 궁금하고 그립기도 하지만, 차츰 기다림도 희미해지는 요즘이다. 장자(莊子)는 부인이 죽었을 때, 춤추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왜 그러냐고 묻자, 원래 형체가 없던 것이 모습을 이루어 살다가 다시 본디로 돌아갔으니 좋은 일 아니냐고 대답했다 한다.


  나도 본래 있던 모양대로 돌아갈 시기가 가까웠음을 생각한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다가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며 아침 이슬에 목을 축이고 향긋한 풀꽃에 앉아 꿀을 빠는 여행을 떠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한 마리 나비로 태어나 훨훨 날아 꽃을 찾아 향기에 취해 사는 생이나 인간 100년 사는 생이나 눈 깜박하는 찰나를 사는 건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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