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종언을 소망하며
벌써 3년째 covid-19와 동행하는 삶을 견디며 삽니다.
오미크론이 위세를 떨치며 10만 명 넘는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루 수십만 명의 확진자가 나오다가 줄어들어야 팬데믹 상황이 멎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2월 18일 '빌 게이츠'는 covid-19가 종식되지만, 또 다른 팬데믹이 닥칠 것이 확실하다고 겁을 주면서 인류가 좀 더 적극적이고 신속하게 대비하고 대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코로나 사피엔스의 푸념
스마트 폰이 진저리를 친다. ‘백 00’ 이라는 발신자 이름이 보인다.
“백형, 오랜만 이우. 집안 다 건강하시죠?”
“돌아다니지 못해서 답답한 거 빼고는 별일 없이 건강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통화 내용은 수필 동아리 모임은 못 해도 몇 명이라도 만나서 얼굴도 보고 점심을 먹으며 멈춘 정을 이어보자는 제안이었다. 동아리 모임 날이던 목요일 오전에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내기로 합의하고 통화가 끝났다.
어쩌다 이런 이상한 삶을 살게 되었는지, 매주 만나서 수필을 읽고 합평하며 즐겁게 점심을 먹던 목요일의 일상이 무너졌다. 겨울 동안 잠시 쉰다는 게 벌써 7개월째 만나지 못하고 있다. 6월 말에 한 차례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지만, 6명만 나와 서로 얼굴을 보고 점심을 함께하고 헤어졌다. 그렇게라도 만나서 얼굴 보고 오랜 시간 강제 격리된 마음의 끈을 이어보자는 간절한 생각이 묻어나는 전화였다.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지만, 말년에 새로 만난 수필을 좋아하는 이들이다. 저마다 다른 인생 경로를 걸어온 이들이 만나 생각의 외연을 넓히는 일이 좋아서 매주 한 번씩 모였었다. 만난 지 5년째, 서로 챙겨가며 북돋아 주는 좋은 모임이다. 지겨운 코로나바이러스가 행패 부리기 전까진 그랬다. 봄부터는 조금 더 진지하게 수필을 연구하고 재미있는 일도 만들어보겠다는 구상을 했는데, 덜커덕 코로나바이러스가 들어와 우리 모두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집돌이 영감‧할몀으로 처박아버렸다.
전염병이 무섭다는 걸 내가 처음 겪은 건 1950년 한국전쟁이 시작되던 6월 하순 무렵이었다. 아버지 고향인 익산 용안면에 사는 한 친척이 장티푸스에 걸려 전주에 왔다가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우리 집을 찾아 들어왔다. 당시만 해도 전염병에 대해 잘 모르던 시절이어서 환자에 방 한 칸을 내주었다. 전쟁이 시작되어 모두 피난길에 오르는 상황이라 의사도 없고 약도 쓰지 못한 채 이튿날 환자는 저세상으로 갔다.
환자가 관에 담겨 우마차 편으로 고향으로 간 뒤에 우리도 피난길에 오르려 했지만, 온 식구가 열이 나고 설사를 하면서 장티푸스에 걸린 걸 알았다. 다행스럽게 어머니와 둘째 형이 병에 걸리지 않아 10명이 넘는 환자를 간호하고 수발했다. 수소문 끝에 약을 조금 구해 쓰기도 했지만,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고 어머니가 알아본 단방약으로 거의 한 달 남짓 고생한 끝에 병을 물리치고 일어났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대구를 비롯한 전국에서 들불처럼 번져갈 때, 그 오랜 죽음의 기억이 불쑥 머리를 들고 다가섰다. 시신이 들려 나갈 때 문지방 앞에서 밟아 부서지던 바가지 깨지는 소리와 가족들의 울음소리가 내 기억 속에 남아 소름 돋게 했다. 그 무지하던 시기에 장티푸스는 저승사자의 부름이었고 항거할 수 없는 절대자의 칼날 같은 두려움이었음을 생각한다.
동아리 모임을 반년 넘게 쉬면서 몇 번이나 임시 모임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 오랜 죽음의 기억과 자칫 회원 가운데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의 무게를 견딜 수 없을 것이라는 걱정이 내 의지를 가로막았다. 아니 어쩌면 내가 바이러스에 감염될까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살 만큼 살았는데 뭐가 두렵냐’라고 큰소리를 치던 허세의 밑바탕에는 거꾸로 매달려 살아도 이승이 좋다는 간절한 생존의 열망이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최근에 ‘코로나 사피엔스’라는 말이 생겼다. 호모 사피엔스가 이제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 사는 시대이니 코로나 사피엔스가 된 것이다. 현명한 코로나 사피엔스로 살기 위해 모임을 시작하자는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다시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는 게 두려웠다. 나중에 못난 리더였다는 평을 듣는 쪽을 선택하기로 작정하고 목요일을 그냥 넘겨버렸다.
사실은 이런 책임 운운하며 변명을 하는 일도 나를 합리화하거나 내면에 든 두려움을 감추는 수단의 하나일 것이다. 당분간은 얼굴 볼 일이 없으니 그럭저럭 넘어가고 나중에 미안했다고 사과라도 할 요량으로 눈 질끈 감고 문자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오랜 시간 서로 얼굴을 보지 않아서 별로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정출 어근(情出於近)이라던 옛말이 허사(虛辭)가 아닌 것을….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는 코로나 사피엔스이니 어쩌랴.
이제 코로나 블루를 견디느라 허물어진 마음을 차츰 추슬러 단단히 하고 코로나 사피엔스의 현명한 삶을 살아야 한다. 벗어날 수 없다면 현명하게 동행하라는 말처럼 바이러스를 달래 가며 남은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 때에 따라서는 ‘괜찮아! 괜찮아!’라고 나를 속이는 주문을 걸어가며 이 어려운 시기를 슬기롭게 넘어 성공한 코로나 사피엔스의 반열에 들어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