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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르고운 Mar 06. 2022

내장산에 핀 변산바람꽃

분수를 아는 작은 풀꽃에 마음을 들켜고...


  2월 마지막 주일에 정읍 내장산에 변산 바람꽃이 피었다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린 걸 보았다. 변산 바람꽃이 변산에 피었다는 기사는 해마다 보았지만, 내장산에 피었다는 기사를 본 건 처음이었다. 야생화 촬영을 좋아하는 내게 그 소식이 들렸으니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기사를 보자마자 정읍에 전화를 걸어 내장산 어디에 피었는지를 알아보았다. 더구나 변산 바람꽃은 내가 지난해에 시기를 놓쳐 촬영하지 못했던 터라 반드시 찾아가 촬영하겠다고 작정했다. 마침내 내장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 연결이 닿아 꽃이 핀 지점을 확인하고 안내를 받을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원래 변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변산바람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꽃은 이른 봄에 복수초와 노루귀 등과 거의 같은 시기에 눈이 채 녹기도 전에 피기 시작한다. 화경(花俓)이 2~3㎝ 남짓이고 꽃대 길이가 10~20㎝인 꽃인데 나팔 모양인 암술이 꽃 중앙의 수술을 빙 둘러싸고 있는 독특한 모양이다.


  내가 지난해부터 야생화에 빠져들어 촬영하면서 느낀 중요한 사실이 있다. 야생화는 같은 종류이어도 피는 장소나 시기, 영양 상태에 따라 꽃의 색과 모양, 꽃술 형태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발견한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같은 종류의 꽃이어도 일단 카메라를 들이대고 뭔가 다른 점이 있는지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더구나 맨눈으로는 거의 식별이 어려운 작은 꽃들은 꽃술의 개수나 색깔, 섬모의 길이 등 피는 장소의 조건에 맞추어 핀다는 걸 알았다. 척박한 환경에서 씨앗을 퍼뜨려야 하는 야생화의 살아남기 전략인지, 진화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적응력은 놀라웠다.     




  선배 사진가와 연락하여 다음 날 촬영가기로 약속하고는 조명 장비까지 챙겨보니 무겁다. 다 덜어내고 필요한 장비만 넣었는데도 제법 묵직하다. 그래도 가을에 이별한 야생화를 만난다는 설렘에 잠을 설치고 이튿날 정읍으로 달렸다.


  정읍 내장산 국립공원에 도착하여 기다리던 직원의 안내로 꽃이 핀 현장을 찾아갔다. 그런데 젊은 직원이 맨몸으로 가는 뒤를 따라가려니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다. 더구나 얼마 전에 허리 요추 협착증으로 신경차단 시술을 받았던 게 잘못되어 통증 치료까지 받았던 터라 아직도 걸음이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새봄에 만날 변산바람꽃이 금세 눈앞에 아른거려 숨을 헐떡이면서 안내하는 직원을 따라갔다. 산에는 아직 눈이 덜 녹아 하얗게 쌓여있고 군데군데 얼어 미끄러운 길도 남았다. 처음 만나는 예쁜 봄꽃을 찾아가는 길에 눈이나 얼음은 아무런 지장이 아니었다.


부지런히 걸어서 마침내 골짜기 옆, 볕이 따사로운 곳에 이르렀다. 안내 직원은 아직 꽃잎이 벙글어지지 않은 꽃 몇 포기를 가리키며 그 일대를 조심스럽게 찾아보라고 일러주고 돌아갔다. 얼핏 눈에 띄지 않던 변산바람꽃이 차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장비를 내려놓고 카메라 세팅을 마친 다음에 조심스럽게 현장에 들어갔다. 자칫 밟거나 발로 차는 일이 없도록 조심했다. 꽃들은 거름이 넉넉하지 않은 땅인지 키가 작고 꽃도 작아 보였다. 식물도감에서 보던 만큼 꽃술도 많지 않았다.


매크로 렌즈를 통해 자세히 본 꽃은 어딘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내장산의 환경에 맞도록 적응하고 진화한 것인지 싶어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매크로 촬영은 삼각대를 쓰지 않으면 제대로 촬영할 수 없다.


더구나 작은 야생화는 미풍에도 끊임없이 흔들려 삼각대를 받치고도 리모컨으로 셔터를 눌러 기계적 흔들림을 막아 주어야 흔들리지 않는 사진을 얻을 수 있다. 그것도 바람이 부는 방향을 차단하여 꽃이 떨리는 걸 막을 수 있어야 가능하다.




땅바닥에 엎드려가며 한 시간여를 촬영하고 일어서니 허리가 뻐근하고 관절이 비명을 지르는가 하면 눈앞이 빙빙 돈다. 야생화 촬영은 노인에게 극한작업이다. 어렵게 촬영을 마치고 정읍을 거쳐 집에 돌아왔다. 집에 와서 아직 해가 남은 시간이 아까워 자전거를 타고 인근 천잠산 등산로를 찾았지만, ‘큰 개불알꽃’이 피었을 뿐, 다른 건 찾을 수 없었다. 


저녁을 대충 먹고 카메라 메모리를 열어 촬영한 사진을 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변산국립공원의 변산 바람꽃은 암꽃술이 수꽃술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 15개 정도인데, 내장산에 핀 변산 바람꽃은 암술이 5~6개에 불과했다. 꽃잎 색도 완전히 백색이어서 약간 자색이 돋는 변산의 꽃과 달랐다.


작은 풀꽃들은 사는 환경에 따라 쉽게 형태나 색깔이 다르게 자라는 걸 야생화를 촬영하면서 수없이 보았다. 작은 야생화들은 척박한 환경에 적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으므로 물을 적게 쓰고 영양소가 적어도 살 수 있게 작아진 꽃들이다. 


분수에 맞추어 사는데 익숙한 작은 야생화를 다시 확인하며 홀로 노인인 주제에 나는 과연 분수에 맞게 잘살고 있는지 생각했다. 내장산의 변산바람꽃이 암술을 줄여 가며 살 듯, 내 삶도 분수에 맞게, 좀 더 치열하게 살아야 돌아가는 날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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