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때는 세상에 나오던 그 알몸으로 혼자서 건너야 한다.
징검다리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길이고, 이어주는 수단이다. 저편에 보이는 계단까지 자박자박 돌을 하나씩 밟아 물을 건너가는 일은 숱한 뜻을 읽어볼 수 있게 한다. 피안(彼岸)을 향해 묵묵히 수행의 길을 걷는 구도자의 길일 수 있고, 태어나서 죽음을 향해 가는 모든 생물의 한 삶이 될 수도 있다. 평평해 보이지만, 자칫하면 미끄러질 수도 있고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질 수도 있다. 추운 겨울에 얼면 대단히 위험한 돌다리가 된다. 이승에서 저승을 향해 한발 한발 걷는 걸음은 사람마다 빠르기와 보폭은 다를지언정 결코 피할 수 없는 길이다.
나는 저 징검다리의 몇 번째 돌을 밟고 있을까? 거의 다 건너서 이제 계단을 오르는 절차만 남아 있는 건 아닐까? 나를 남겨두고 먼저 건너 가버리거나, 건너지도 못하고 물에 빠져 한 없이 떠내려갔는지도 모를 안타까운 내 딸아이와 먼저 건너간 아내, 부모 형제, 그리운 모든 이들의 걸음이 저 돌들을 밟고 갔을 것이다. 처음에는 넓고 편한 돌이 놓여있는데, 점점 작아지고 비뚤어져 건너기가 어려웠을 듯싶은 징검다리.
갈 때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세상에 나오던 그 알몸으로, 혼자서 놓인 돌을 하나하나 밟으며 건너야 한다. 수십 대의 고급차를 가졌다는 삼성의 이건희 회장도 걸어서 건너갔을 길, 저 끝 계단을 올라갈 땐 빈 몸, 빈손일 수밖에 없는 길이다. 내가 담아낸 저 길을 잘 건너기 위해 우리는 그 긴 밤을 곧추 새기도 했다.
비 갠 초저녁 산책길에는 채 스며들지 못한 빗물이 군데군데 남아 자전거 바퀴에 감겨 내 등에 뿌려지기도 했지만, 빗물이 부풀린 흙냄새와 시원함 바람은 상큼했다. 시원하게 짧은 옷차림으로 걷는 여자들, 걸음걸이에서 나이가 보이는 중년들, 불편한 몸을 이끌어 힘겹게 걷는 사람들의 몸짓에서는 하나같이 건강하게 이 여름을 넘겨보겠다는 열망이 보였다. 어둠이 내린 삼천 산책길에 흐르는 자유를 공유하는 즐거움이 넘쳤다.
삼천을 따라 구이면 지역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밤빛이 익어 도시의 불빛과 어우러질 때 사진 거리를 찾아야 하므로 시간을 죽일 겸, 깨끗한 공기를 마음껏 마셔볼 요량으로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사람이 조금 줄어들었을 즈음에 자전거에서 내려서 걷기 시작했다. 자전거 위에서 보던 산책길의 주변 풍광이 걸으면서 보는 것과 사뭇 다르다.
걸으면서는 자전거를 타고 갈 때 달리는 속도에 따라 내 살갗을 스치며 시원하게 해 주던 바람을 느낄 수 없다. 대신, 걷게 되자 밤공기가 천천히 내 몸의 촉각을 열고 몸 안으로 잠든 감각들을 깨웠다. 산책길 바닥에서 빛나는 유도등의 빛이 한결 맑아졌고, 길섶의 개망초와 드문드문 핀 달맞이꽃이 내게 걸어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마주치는 젊은 여자들의 상큼한 체취와 옆에서 걷는 연인들의 다정한 몸짓과 들뜬 음성, 배출하는 엔도르핀 같은 사랑의 느낌이 전해왔다. 가로등 빛이 흐르는 물에 휘감기고 굴절된 빛과 섞여 산책길 작은 웅덩이와 냇물에 반사되어 사람들의 얼굴에 흔들리며 숨바꼭질하는 밤길의 정취는 새로웠다.
한 걸음 두 걸음의 빛이 다르고, 바람이 다르고, 소리가 다르고, 냄새가 다르고, 살갗을 스치는 촉감이 달랐다. 그 감각은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쏟아내는 에너지와 소리, 일으키는 파문이 모두 혼합되어 내게 전해지는 어떤 메시지 같았다. 그 파동은 살아있는 의미와 움직이는 것들의 에너지와 걷는 이들이 산책길에 만들어 낸 색색의 상념들이 서로 어울리고 화학반응을 일으켜 전해오는 것이어서 다양한 맛과 자극으로 다가왔다.
다가서는 맛과 자극을 형상으로 그려낼 어떤 대상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두리번거리다가 우연히 냇물을 건너갈 수 있도록 돌을 놓아 만든 징검다리를 발견했다. 널찍널찍한 큰 돌들이 빗물에 젖은 위에 건너편의 불빛이 살며시 반사되어 보실거린다. 흐르는 냇물이 징검다리 돌 사이를 빠져나가면서 작은 소용돌이를 이루며 소곤거리는 소리와 수면에서 반사하는 빛이 나를 빨아들이듯 잡아끌었다.
건너편 가로등 빛을 여리게 되비쳐주며 내게 익숙하게 말을 걸어오는 징검다리. 천변 산책길에 넘쳐나던 사람들이 기를 쓰고 걷는 이유와 더위를 이기려 애쓰는 까닭이 모두 거기에 있음을 내게 귀띔했다. 저 건너편 언덕에 이르는 길, 세상의 어지러움과 더러움을 떨치고 비로소 마음을 얻어야 이를 수 있는 피안(彼岸)이 바로 저기라는 걸 말해주었다. 아등바등하며 이 어려운 세상을 버텨나가는 까닭이 징검돌을 차분하게 밟아 조금이라도 쉽고 아쉬움 적은 행보를 하고 싶은 열망에서 나온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삼각대에 카메라를 걸고 조심스럽게 구도를 잡아 셔터를 눌렀다. 조리개를 줄여 장시간 노출을 주는 동안 여러 사람이 징검다리를 건너갔다. 여러 차례 반복해서 같은 방면을 촬영하고 사진을 확인했다. 여러 사람이 건너갔는데 그들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가 이 우주에 살았고 또 다른 이들이 살겠지만, 우리나 그들의 흔적은 내 사진 속의 징검다리처럼 아무런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는 걸 사진은 잘 보여주고 있었다.
제주의 혼이 된 젊은 사진가 김영갑은 “내가 붙잡아두려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들판의 빛과 바람, 구름, 비, 안개이다. 최고로 황홀한 순간은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삽시간의 황홀이다.”라고 했다. 그는 변화무쌍한 제주의 풍광을 가장 황홀한 순간에 사진에 담아, 사진을 보는 이가 그 모든 것을 한 장의 사진에서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죽음이 엄습하는 순간에도 그는 그 소망을 버리지 않고 버텼다.
날라리 사진쟁이에 불과한 내가 목숨을 건 사진가의 마음을 다 알 수 없건만, 어두운 밤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자연의 일과 사람의 끝을 같은 선 위에 올려보려 노력했다. 그리고 멈춘 듯 흐르고 있는 물과 바람과 그리움의 흔적을 어설프게나마 담아낼 수 있어서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