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천수경

by 푸르고운
분홍장미1.jpg 국립전주 수목원에서

5월의 푸름이 부르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자전거를 타고 나섰다. 어디로 가겠다는 작정도 없이 길 위를 달리는 일이 좋아서이다. 늘 다니던 전주 삼천 천변길을 달리다가 갑자기 5월의 파스텔 산색이 그리웠다. 더불어 오랜만에 땀을 흘려보고 싶어 모악산 자락을 따라 방향을 틀었다. 가파른 3.2km 독배 고갯길을 넘어 금산사 입구 네거리에 닿았다. 부처님오신 날을 봉축하는 펼침막에 끌려 금산사로 방향을 돌렸다. 자전거로도 여러 차례 갔었고, 사진을 찍으러, 마음을 달래러, 아이들과 아내와 함께 수없이 들렀던 마치 고향처럼 편한 절이다. 결혼 날 신혼여행을 출발한 곳도 금산사였다.


경내에 들어가 약수터에서 물을 받아 마시고 미륵전 앞 계단 옆에 앉아 쉬고 있었다. 석탄일을 앞두고 있던 참이라 오색 연등이 수없이 걸려 흔들리고 방문객과 스님들의 발걸음도 분주했다. 그 때, 스피커에서 귀에 설지 않은 독경 소리가 들려왔다.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 …(중략)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 …(후략)’라는 천수경(千手經)이 낭랑하게 들려왔다. 천수경 가운데 내가 기억하는 부분은 앞에 적은 몇 마디뿐이다. 어렸을 적에는 훨씬 더 많은 구절을 외울 수 있었는데 지금 기억하는 부분은 달랑 이것뿐이다. 귀에 익은 몇 대목이 들리고, 기나긴 나머지 내용은 알지도, 짐작하지도 못한다.


천수경을 따라 아득한 옛일들이 기억에 되살아 나오기 시작했다. 독경은 이내 어머니의 음성으로 바뀌어 내게 들려왔다. 어머니의 음성은 가만가만하고 차분했다. 스피커의 독경처럼 낭랑하거나 가락이 멋들어지지 않았지만, 간절한 어머니의 마음이 넉넉하게 스며있어 따뜻했다. 아! 어머니, 까마아득하게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리운 음성과 한없이 따스하던 손길이 닿는 듯, 기억의 저편에 잠들어 있던 지난 파일들이 열려 나왔다.


약골로 태어난 나는 어릴 적에 나는 몸이 퍽 약해서 항상 감기를 달고 살았고 4~5살 무렵에는 폐렴에 걸려 거의 포기해야 할 정도였다고 했다. 매일 어머니와 누나의 등에 업혀 병원에 다니면서 주사를 맞았고 어머니는 밤마다 나를 안고 천수경을 외웠다. 관세음보살의 자비로움을 찬양하여 막둥이 아들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셨다. 어머니의 천수경은 항상 자장가처럼 나를 재우고 지켜주어 거의 1년 만에 폐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천수경을 외우는 것 말고도 삼국지, 수호지, 장화홍련전 등 고전 소설을 외우고 계셨다. 특히 방대한 삼국지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우고 있어서 형제들은 틈만 나면 이야기해 달라고 졸랐다. 100만 대군의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10만 유비와 손권 연합군에게 패하여 달아나는 대목이나, 관우가 조조를 살려주던 이야기 등 실감 나는 어머니의 구연(口演)에 형제들은 신바람이 났었다.


어머니는 이 나라의 옛 여인들이 그러했듯이 딱히 불교도라고 이름 지어진 신자는 아니었지만, 초파일 무렵이 되면 가까운 절에 가서 연등을 켜고 부처님에게 발원하기 좋아했다. 그럴 때도 어머니를 따라가는 일은 항상 내 몫이었다. 가는 댓살로 동그랗게 엮어서 물들인 한지를 바른 연등에 촛불을 넣어 하늘거리는 밑에 소원을 적어 매달고 등에 이름을 적어 놓기도 했던 초파일의 저녁 풍경과 목탁 소리에 장단을 맞춘 스님의 독경 소리가 어울려 내 기억 속에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축복과 간절함, 평화와 따스함이 번져 나오던 아렴풋한 그리움이 그 먼 시간을 거슬러 오늘 나를 금산사로 이끌었는지 모른다.


어머니의 천수경은 내가 군대에 가 있던 어느 날 ‘모친 별세 급래요망’이라는 전보(電報)를 끝으로 더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64년의 삶에서 수천, 수만 번 외운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덕분인지 어머니는 당신이 사랑하는 아버지 옆에서 잠든 채로 아무도 몰래 이 세상의 굴레를 벗었다. 언제나 깨끗하고 참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찬양했던 어머니는 천수경 가운데 ‘원아조득월고해(願我早得越苦海)’라는 소망을 이루어 기쁜 마음으로 가셨을까? 며칠 남지 않은 막둥이 아들의 첫 휴가에 맛난 음식을 해주지 못해서 못내 안타까우셨을까? 어머니는 내가 여태 보아온 어느 주검보다 평화로웠고 안색이 약간 창백한 것 외에는 평소와 달라 보이지 않게 잠든 모습이었다. 그 아름다울 만치 편안히 누워있는 어머니를 꽁꽁 묶어 관에 모시고 땅에 묻을 때, 내 생애에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그날, 떠나는 어머니를 위해 천수경을 외우고 싶었지만, 처음 몇 줄밖에 기억할 수 없어 슬펐다.


어머니가 가시고 50년이 더 지났지만, 그렇게 갑작스레 육신을 버린 까닭을 몰라 통곡하던 마음이 그대로 남아있음을 오늘 알았다. 여태 나는 어머니를 보내드리지 못하고 가슴 깊은 자리에 천수경 소리와 함께 묻어두고 까마아득하게 잊고 살았다. 세상에 태어나는 일이 다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의 시작인 것을 늦게야 거니챈 내가 지난 시간을 되짚어 보며 안타까워했던 마음에는 어머니처럼 그렇게 가뭇없이 떠나고자 하는 소망이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제 내가 어머니를 보내드려야 할 때가 되었을까? 당신이 외워 나를 지켜주었던 천수경을 이제는 내가 읽어서, 지금이라도 왕생극락을 빌어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천수경을 읽어보려고 인터넷을 뒤져 경문을 찾았다.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 … …. 경을 읽는 내내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목이 메어 끝까지 다 읽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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