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다 그런 거야.”
처음 들었을 땐 위로처럼 느껴졌던 이 말은, 반복될수록 한 사람을 조용히 고립시키는 주문 같았다. 회의에서 불합리한 상황이 생기고, 프로젝트에서 공을 가로채이는 일이 반복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어깨만 으쓱였다.
“그냥 다 그런 거야. 사회생활은 원래 그런 거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팀장님은 이 말이 더는 위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이 말은 구조를 지켜주는 주문이 아니라, 나를 침묵시키는 명령문이었다.
팀장님은 회사를 오래 다녔다. 좋은 평가도 받았고, 함께 일한 사람들 대부분은 그를 신뢰했다. 하지만 그건 오롯이 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갈등을 피하는 능력, 날카로운 말을 삼키는 능력, 눈앞의 불합리함을 견디는 능력이 쌓인 결과였다.
어느 순간부터 팀장님은 “괜찮아요”라는 말을 습관처럼 달고 살았다.
무례한 말을 들어도, 아이디어를 도둑맞아도, 말도 안 되는 일정이 내려와도, 그는 늘 괜찮다고 했다.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진짜 감정은 하나씩 숨겨졌고, 결국 자신조차 괜찮지 않게 되었다.
결정적인 날은 아무런 경고 없이 찾아왔다.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동료가 퇴사를 결심했다.
점심 식사 후, 평소보다 조용하던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팀장님, 눈빛이 예전 같지 않아요. 많이 힘들어 보여요.”
그 말을 들은 순간, 팀장님은 웃으며 넘겼지만 마음 한쪽에서 큰 파문이 일었다.
정말 괜찮지 않았다는 걸, 이 말 한 마디가 너무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간 그는 오랜만에 거울을 들여다봤다.
피곤함에 절은 얼굴, 초점 없는 눈동자. 그제야 깨달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다음 날 아침, 출근 전 책상 앞에 앉아 노트 한 귀퉁이에 썼다.
‘이제 나부터 구할 차례야.’
그 문장은 결심이자 선언이었다. 더는 참지 않겠다고. 더는 나를 방치하지 않겠다고.
작지만 분명한 첫걸음이었다.
팀장님은 인사팀에 연락했다.
직장 내 괴롭힘, 부당한 평가, 반복된 모욕에 대한 사례를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상담사의 말은 짧았지만 강했다.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자체로 큰 용기세요.”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말한 것’만으로도 감사를 표한 건.
그 말에 팀장님은 오래 묵힌 눈물을 쏟았다.
감정을 드러낸다고 해서 약해지는 게 아니라는 걸, 그는 비로소 체감했다.
상황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그를 불편해하는 상사의 시선은 더 날카로워졌고, 몇몇 동료들은 슬쩍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속으로 공감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작은 회의실 안에서, 담배를 피우던 뒷계단에서, 커피를 들고 선 복도 끝에서, 누군가는 조용히 말을 걸었다.
“사실 나도 그런 일 겪었어요.”
“나만 이상한 줄 알았는데, 듣고 나니 조금 안심돼요.”
공감은 연결을 만들었고, 연결은 희미한 연대를 만들었다.
팀장님은 감정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매일 퇴근 후 하루 동안 겪은 일들을 정리했고, 그 안에서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오늘은 내 의견을 끝까지 설명했다.”
“회의 중 한 차례, 목소리를 높였다.”
이렇게 기록을 하다 보니 작지만 분명한 변화들이 눈에 보였다.
그는 더 이상 부당함에 침묵하지 않았다.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물론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매번 긴장했고, 말실수를 하진 않았나 걱정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말하고 난 뒤의 불안보다, 참았을 때의 후회가 더 오래 남았다.
그래서 팀장님은 결심했다.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말하는 쪽을 선택하겠다고.
회복은 선명한 곡선이 아니라, 들쭉날쭉한 선 같았다. 어느 날은 용기가 넘쳤고, 어느 날은 눈물이 먼저 났다. 하지만 그는 매일 아침 다짐했다.
“오늘 하루도 나를 지키자.”
그리고 매일 밤, 거울 앞에서 자신에게 말했다.
“잘 버텼어. 그걸로 충분해.”
사람들은 말한다.
“원래 다 그래.”
하지만 이제 팀장님은 안다. 원래 그래야만 하는 일은 없다.
작은 저항이 쌓이면, 언젠가는 흐름을 바꿀 수 있다.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는 건, 거대한 혁명이 아니라 아주 작은 선택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는 매일 그 선택을 반복한다. 자신을 방치하지 않기. 침묵하지 않기.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포기하지 않기.
이제 그는 안다. 누구보다 먼저, 자신을 구해야 한다는 걸. 그래야 누군가의 손을 잡아줄 수도 있다는 걸. 그래서 그는 오늘도 마음속에 되뇐다.
‘이제 나부터 구할 차례야.’
사라지지 않기 위해 쓴 문장들은 결국 한 권의 책이 되었습니다. 《그날, 나는 나를 구했다》에서 저의 고백을 더 이어가고 있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드리며, 혹시 더 많은 이야기와 작은 위로들을 듣고 싶으시다면 그 책 속에서 함께 걸어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