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han KIM Dec 20. 2016

[ESC] (1) 졸업

충실함의 오모한 회색시공에서

어느덧 졸업한다.



정말 어느덧이다 어느덧.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광복관의 봄날 한기를 처음 느꼈을 때,

아침 9시쯤 되어 노곤한 몸을 이끌고 백양로 또는 공학원 통로를 바락바락 밟아나갈 때,

다음날 오전 12시쯤 되어 그날 하루를 음미하며 홀가분히 광복관 계단을 내려갈 때,

체력이 남아 청송대 옆으로 뛰어가며 악동뮤지션의 신보를 듣던 때,

신(新)백양로의 경치를 즐기며 걸어가던 때,

그때 듣던 아델의 25, 넥스트 4집, 린킨파크&제이지 , 혼성듀오 달달이들, K-POP STAR(샘킴, 이진아), 슈퍼스타K6(곽진언, 김필), 신해철,

스터디원들과 어느 봄날 신중도 8층 까페에서 커피를 시킬 때,

시험이 끝난 어느 날 아침 사물함 앞 복도에 주저앉아 사물함 정리를 할 때,

스터디원들과 매일 아침 9시 지하 1층 스터디룸에서 출석체크를 할 때,

지하 1층 스터디룸에 출석체크를 한 후 새로 생긴 매점에서 과일야채를 살 때,

누군가와 교직원 식당에서 밥을 먹고 과학관 커피를 마시러 갈 때,

어느 봄날 복도 끝의 창문 밖 하얗게 빛나는 벚꽃무리를 발견했을 때,


원래 내 안에 뭐라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안일하게 한 학기를 보낸 다음 결과를 받고 후회할 때,

그러고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다음 학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을 때,


교과서 마지막 강의를 부암동 까페에서 마무리짓고 서촌으로 술마시러 갈 때,

인턴에 나가서 한 사람과 일주일 중 절반을 술로 의기투합했던 때,

사람들과 민사 강화프로그램 전에 서촌 ‘도성’에서 술먹던 때,

한 사람과 낙성대 바에서 콜키지 따서 얼굴이 벌개지도록 술먹던 때,


그녀와 시간을 내어 홍대나 연남동으로 즐겁게 놀러나갈 때,

그녀와 어느 여름날 숲속불가마 24시에 가서 한창 데이트하던 때,

그녀와 어느 늦은 여름날 홍대에서 점심을 먹고 서울숲으로 가서 잔디를 즐기던 때,

그녀와 어느 여름날 한강에 돗자리를 펴고 페르세우스 유성우를 보며 밤새던 때,

그녀와 어느 가을날 청경관 오늘의 메뉴를 먹고 나와 천문대 망원경과 시선을 마주치며 걸을 때,

봄에 폈던 꽃잎을 말려두었다가 정성스레 붙여 쓴 편지를 받던 때,

나에게는 말려둔 꽃잎이 없어 생화를 사다 물병에 꽂아줬던 때,

지하철 사물함에 미리 꽃을 넣어놨다가 데이트 후 짜잔 하고 꺼내줬던 때,

그런데 생각보다 시들어서 나도 조금은 시무룩해졌던 때,

그럼에도 시들지 않고 생생하게 피어났던 그녀를 볼 때,

그녀와 서문 식당에 밥먹으러가면서 한창 불어오는 바람과 늦저녁 햇살을 맞던 때,

해남과 제주도를 여행하고 바로 광주로 갔다가 대전 소재 국제지식재산연수원 수업에 들어가던 때,

그 IP수업을 듣다가 나와서 그녀를 보기위해 서울대전 KTX를 왕복하던 때,


기록을 미친듯이 뒤적이면서 그 속 세계를 여행할 때,

기록 속 스토리를 완성하면서 마치 롤플레잉 게임을 하고있는 기분이 들었을 때,

방대한 양의 페이지가 모두 사진으로 찍혀 내 머릿속의 한 점이 되었다는 확신이 들 때,

그럼에도 확신이 들지 않아 일단 기억나는대로 답안지를 작성할 때,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게 되는 사태를 경험할 때,

약기운을 빌리지 않으면 안되는 상태로 버텨나갈 때,

그럼에도 끝난 직후 그냥 별거아닌 기분이 들어 더 스스로 놀랍던 때,


... 생각보다 많네.


충실함 : 밀림(密林)과 왕도(王道)


이곳의 생활은 ‘충실함’으로 요약하고 싶다. 연애에 충실했고, 공부에 충실했고, 나의 내면에 충실했다. 집단으로 어울리는 법을 다소간 배우지 못 점이 못내 아쉽지만, 점점 나아지겠지. 연애가 싹을 틔워 하나의 밀림(密林)을 이뤄왔던 만큼, 어렵고 막막하기만 했던 수험공부에도 충실함을 기한 끝에 그 왕도(王道)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만큼.


졸업이 곧 새로운 시작이라는 클리셰를 전제하고, 나는 무엇의 끝이고 무엇의 시작인가에 대하여 덧붙이고 싶다. 졸업은 한 충실함의 끝이고, 새로운 충실함의 시작이다. 졸업시에 충실함의 결실을 맺고, 그 다음 단계에 새로운 충실함을 투여하면서 다시금 또다른 왕도(王道)를 찾아간다.


오묘한 회색시공


결국 졸업식은 졸업과 시작이 걸쳐있는 오묘한 회색시공이다. 내가 여태까지 투여해 온 충실함의 크기를 만끽하며, 내가 이제부터 투여할 충실함의 크기를 가늠해 보는 오묘함이 졸업식에 깃들어 있다. 이 건물에 묻은 나의 흔적을 지우며,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흔적을 다시 새겨나가자. 내가 이 장소에 쏟아부었던 충실함의 중량(mass)과 감촉을 잊지말고 그것대로만, 그것만큼만이라도 살아가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