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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Oct 02. 2019

태풍이 오기 전에

2019년 10월 2일, 태풍이 오고 있었고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1. 또 태풍이 온다. 한번 해보니까 다들 좋아하길래 분위기 파악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해대는 부장님의 아재 개그 같다.


2. 내가 바다를 처음 본 건 스물일곱 살 부산에서였다. 부산국제영화제 취재를 갔을 때였다. 백사장이 펼쳐진 바다를 그때 처음 봤다. 우리 가족은 먹고 살만큼 살았지, 먹고살면서 남길 만큼 살진 못했다. 그나마 그조차도 40평짜리 아파트를 사고 비로소 집안의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한 지 2년여 만에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나고, 집안이 파산한 이후론 풍요로운 과거일 뿐이었다. 뒤늦게 생각해보니 우리 가족은 함께 여행해본 적이 없었다. 가끔씩은 그게 별일인가 싶다가도 별일이지 싶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생소한 일이 된다는 것이. 절실함이나 간절함과는 결이 다른 쓸쓸함 같은 기분이.

3. 올해는 부산국제영화제에 가보려 했는데 수습할 일들을 살펴보니 아마 못 갈 거 같다. 부국제 기간의 해운대 바다는 다시 한번 다음 기회로 떠밀려 가는 듯.

4. 인간이란 특별히 대의명분이나 불변의 진리나 정신적 향상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고, 이를테면 깜찍한 여자애랑 데이트나 하면서 맛있는 것 먹고 즐겁게 살고 싶다고 생각할 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5. 인생의 기승전결이고 나발이고 살아남아서 꼭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난 삶이 눈을 가리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이 있어서 지금의 내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덕분에 과거는 별로 그립지 않게 됐다만.

6. 바쁘지만 요즘은 이 바쁨이 한편으론 좋다. 즐길 것이다.

7. 슬픔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감당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에 문득 찾아온다. 아니, 찾아오기도 한다. 기우는 마음을 따라 솔직하게 넘어질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8. 다음 생엔 배로 태어나도 좋겠다. 갈아 마시기 좋게.

9. 누군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나는 어차피 그 마음을 모른다. 그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지 모르므로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할 이유가 없다. 결국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혼자 마음속에 독을 쌓고 있단 말인데, 통쾌하지 않은가. 그러니 그 사람이 최선을 다해서 나를 미워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영원히 마음속에 독을 쌓고 살았으면 좋겠다. 나는 모르는 일이니까. 나는 좋아하는 사람만 생각하고, 보고 살겠다.

10. 요즘은 사법부가 사법부(司法府)인 줄 알았는데 사법부(私法府)였던 걸까 헷갈린다. 헌법을 관장하는 기관이 아니라 사적인 법적 이익을 대행하는 기관 같다고 할까. 법이란 것이 너무 멀고 비좁은 입구 너머에 있는, 가진 자들의 테마파크 같다.

11. 죄가 있다고 가리키는 방향으로 사람들은 일제히 뛰어가 고함을 지르고 책임을 물었다. 그곳에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그 누구도 몰랐지만 사람들은 이미 죄인을 단죄하는 재미에 빠져들어 정신을 차릴 경황이 없었고, 뒤늦게 찾아온 의심 너머의 진실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그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짖어 댔다. 어린 개새끼마냥.

12. 긴장과 불안에 지배당하면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서 자기 삶의 주변을 거창한 언어로 규정하는데 집중하게 된다.

13. 많은 생각들을 죽이고 있는 요즘이지만 '역시 너무 정의롭게 살아도 안돼'라는 말 따위나 성찰이랍시고 끄적거리는 잡것들이 종종 눈에 띄어서 존나 유감이었다는 생각 정도는 털어내고 싶다. 어차피 정의라는 것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했을 비겁한 놈들이 별 걱정을 다.

14. 지옥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모든 악마들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15. 나이는 인생의 무게를 대변하진 않는 것 같지만 인생의 너비를 가늠하는 척도는 되는 것 같다. 나는 내가 자초한 재앙만큼은 철저하게 내 몫으로만 감당하며 살아가는 어른이고 싶다.

16. 이 세상에는 이성적인 인간과 비이성적인 인간 두 종류가 있다. 이성적인 인간은 세상에 적응한다. 비이성적인 인간은 세상을 자신에게 적응시키려고 발버둥 친다. 따라서 모든 혁신은 비이성적인 인간에 의해 일어난다. - 조지 버나드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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