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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ul 13. 2019

워라밸 대신 워워밸

2019년 7월 13일 새벽에 생각한 것.

1. ‘택배기사입니다. 늦은 시간이라 문 앞에 놓고 갑니다.’ 오전 12시 29분에 찍힌 문자였다. 새벽 3시에 가까스로 눈을 떠서 잠이 깬 건 그 문자를 본 덕분이었다. 문을 열어보니 어제 주문한 책이 와있었다. 힘들다는 기분을 느꼈다. 물론 그 택배기사의 심정을 알 길은 없고, 그저 나의 감상에 불과한 것일지 모르지만, 일단 그랬다. 지나치게 감상적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2. 12시쯤 잠이 들었다. 수정해줘야 할 원고가 두 개 있었는데, 침대에 잠시 누웠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가 새벽 3시쯤 눈을 뜨고 다시 일어났다. 금주 내내 평균 세 시간 이상의 수면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다. 어쩌다 보니 월, 화, 수, 목까지, 네 개의 원고를 매일 순차적으로 마감하며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으면 낮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근을 했고, 퇴근하고 돌아와서는 밤의 마감을 막아야 했다. 당연히 내 선택의 결과이므로 억울하진 않았다. 다만 조금 버겁다고 느껴지는 것이 어쩔 수 없었을 뿐이지. 워라밸은 없고 워워밸만 있는 한 주가 된 기분인데, 어쨌든 비로소 끝났다. 한주 내내 해탈하는 기분이었는데 마감을 다 마치고 나니 해장하고 싶다. 다행히도(?) 오늘은 술 약속이 있다.


3. 회사를 다니고 있다. 잡지사나 매체사는 아니다. 스타트업 계열의 미디어커머스 회사다. 한때 같은 회사를 다니던 동료였던 지인이 차린 회사인데, <에스콰이어>를 그만둘 때쯤 입사 제안을 받았고, 고민 끝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도 믿지 못하는 나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 흥미로웠고, 그가 본 믿음의 가능성을 나도 확인해보고 싶었다. 다 떠나서 나름 괜찮은 매출 규모와 이익 구조를 가진 회사라는 점에서도 흥미가 있었다. 제품을 만들고, 파는 과정 자체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다. 실제로 두 달이 넘게 출근해보니 잡지사에서는 느껴볼 수 없었던, 전혀 다른 흥미와 긴장이 느껴진다. 내부자의 시선으로 업무의 진행에 동참하는 과정에서 종종 외부자의 시선으로 조직을 바라보게 될 때도 있는데, 이런 내외적인 관점에서 조직에 수렴하고 관조할 수 있다는 게 내게 있어서는 괜찮은 경험처럼 다가온다.


4. 웬만해선 회사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하는데, 그냥 귀찮아서. 잡지사에 다닐 때에는 대외적인 신뢰가 업무적인 가능성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나의 현재 위치나 상황을 공유하는 것이 종종 중요하다고 느꼈는데, 지금의 회사에서는 회사 내부에서의 업무적 집중도와 관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럴 이유가 없다. 다만 현재 진행 중인 몇몇 사업의 방향성에 따라 그럴 필요가 있을 타이밍이 존재할 거 같기도 하지만, 역시나 그럴 필요가 있을 때에 그런 행동을 하면 되는 것이므로. 어쩌다 보니 많은 것들을 함께 논의해주고, 결정해주고, 상의해줘야 하는 직위를 얻게 돼서 많은 직원들과 소통하고, 일정한 책임과 권한을 행사하는 상황이 됐는데 그 과정에서 깨닫게 되는 바가 적지 않다. 직원으로서의 관점과 상사로서의 관점을 적절하게 이해하는 건 대단히 어렵지만 그래서 중요하다. 직원이 느끼는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선 회사의 입장을 이해해야 하고, 회사가 느끼는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선 직원의 눈높이를 이해해야 한다. 다 떠나서 사람이 하는 일이다. 시스템은 사람을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가진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효율적 기반에 가깝다. 언제나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듣고, 말해야 한다. 그 안에서 한 끗 차이의 가능성을 더 발굴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한 끗 차이가 무한한 결실로 가닿는 것 같다. 결국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일하는 곳이라는 것을 꾸준히 기억하고 각성해야 한다. 직장이란 곳에선.


5. 회사를 다니면서 프리랜서로서의 삶을 이어 나갈 때 중요한 건 서로 다른 두 공간에서의 각기 다른 입장과 업무를 정확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사의 시간에서는 회사의 시간에 충실하고, 프리랜서의 시간에서는 프리랜서의 시간에 충실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균형감각이 전혀 무관한 듯한 양쪽의 일상에 기이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좌뇌와 우뇌를 순차적으로 돌리는 기분이라고 한다면, 이해가 될까 싶지만 나는 종종 요즘 그런 느낌을 받는다. 생각해보지 못한 일을 하면서 이것이 그동안 해왔던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힌트를 얻고, 어느 정도 익숙한 일을 하면서 이것이 여전히 새로운 사고와 감각을 건드리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을 제시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결국 어디에 있건, 나를 운영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어디에 있든 성실한 자세가 중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성실함만큼 중요한 재능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호기심을 유지하는 것만큼 좋은 자세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어디에서든 예의는 실력이다.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예의를 지키는 사람이 가장 실력 있는 사람이라고, 가장 믿을 만한 동료라고 믿게 된다. 그 누구보다도 나는 실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6. 어제의 필라테스는 정확히 100회 차였다. 이번 주엔 마감 일정 때문에 가까스로 한 번의 PT를 받았지만 매주마다 2회 이상씩은 필라테스를 해오고 있다. 1년 가까이 운동을 해오면서 신체의 변화를 느끼고 있다. 신체의 변화를 느끼면서 감각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다. 감각의 변화를 감지하며 생각과 행동의 양식을 가다듬게 된다. 정신은 육체를 지배한다지만 온전하지 않은 육체는 과도한 정신의 소모를 요구한다. 육체가 피로하면 사고도 피로해진다. 생각하기 싫어지면 결국 늙어버린다. 생각을 멈추지 않기 위해, 운동을 하는 건 중요하다. 끝내 육체의 노화는 막을 수 없겠지만 가능한 한 포기하고 싶지 않다. 생각이 늙도록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7. 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지만, 망한 생에도 목표는 있다. 나는 세상에 무해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이번 생을 종결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눈을 감을 때까지 세상에 민폐를 끼치지 않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대단한 업적 같은 것을 기대하면서 주변의 누군가를 해치는 욕망 같은 것은 어차피 내 것이 아닐 거 같지만 내 것이라고 착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믿고 있다. 요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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