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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Nov 11. 2019

뜻밖의 묘연

우리도 이제 고양이 있어. 그렇게 호구가 된다.

고등학생 시절 한 친구는 길에서 고양이를 마주칠 때마다 멈칫했다. 고양이가 무섭다고 했다. 어머니는 집 밖에서 우는 길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아이 울음소리 같아 소름 끼친다고 했다. 어느 직장 동료는 고양이 눈을 보면 왠지 재수 없는 기분이 들어서 싫다고도 했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다. 하지만 나는 고양이가 좋았다. 무엇보다 독립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사람을 잘 따르는 개도 좋았지만 개와 함께 살면서 느낀 건 필연적인 죄책감이었다. 집에 홀로 두는 날이면 언제나 마음이 쓰였다. 집에 돌아온 내게 꼬리를 흔드는 모습이 사랑스러웠지만 동시에 미안했다. 그런데 고양이는 달라 보였다.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자기 일상을 영위하는 모습이 편해 보였다. 그렇다고 정이 없어 보이지도 않았다. 어쩌면 야박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면 적절해 보였다. 그러니 언젠가는 고양이와 함께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로에게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하지만 인생이란 생각처럼 쉽게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여자 친구에게 나와 함께 살던 개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녀는 동물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뜻밖의 알레르기가 있었다. 눈가가 새빨갛게 변하더니 점점 부풀어 오르는데 이대로 계속 부풀어 오르면 풍선처럼 떠오를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여자 친구였던 그녀가 아내가 된 지도 벌써 4년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고양이와 함께 살 거라는 생각이 허망해진 지도 벌써 4년 전의 일이다. 아내에게는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다. 간혹 알레르기 반응이 올라오지 않는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한 집에서 함께 사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될 수 있으니 섣불리 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내 역시 고양이를 입양하는 건 어떨까 언뜻 의견을 피력하긴 했지만 역시나 쉽게 결정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매일같이 알레르기 약을 먹고 견뎌야 할지도 모르는데 ‘감내할 수 있겠느냐’는 몇 음절의 물음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결국 4년 동안 길고양이 밥을 주면서도 집사는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묘연(描緣)’이란 어디로부터 날아오는지 알 수 없는 바람 같은 것이었다.


오래된 집을 사 리모델링을 끝낸 뒤 이사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동네 지인이 된 단골 술집의 사장 부부가 동네에 있는 군인 아파트 놀이터에서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고 했다. 목덜미에 예방접종한 흔적이 있는 걸 보아하니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 같아 일단 집에 데려가 임시 보호를 하면서 동네 곳곳에 전단지를 붙였는데 좀처럼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고민이라 했다. 이미 그 집에도 함께 사는 고양이가 8마리나 있어서 한 마리를 더 들이는 건 부담스러운 상황인 데다 다른 고양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하악질’까지 해대는 통에 결국 가게에서 고양이를 돌보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공간을 낯설어하지 않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고 했다.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개냥이’였다. 낯선 곳에 가면 어디로든 숨어드는 대부분의 고양이와 달리 어디서든 적응을 잘하고 사람도 가리지 않는 리얼 100% 개냥이. 게다가 몇 차례에 걸쳐 아내와 접촉했음에도 아내에게 특별히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은 괜찮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두 번, 세 번, 네 번도 그랬다. 그리고 볼 때마다 가게 곳곳을 활보하고 여기저기서 발랑 드러눕는 녀석을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이 녀석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군인 아파트에서 만났기 때문에 ‘구니니’라고 부른 이 녀석과의 묘연이 특별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결국 영업이 시작됐다.


“새집으로 이사하면 고양이도 데려올까?” 아내가 반문했다. “괜찮을까?” 여느 때처럼 망설임이 없진 않았지만 나름의 설렘도 느껴졌다. 나와 아내의 대화에서 구니니가 등장하는 횟수가 늘었다. 집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 마음속에 들어온 지 오래였다. 그리고 이사 전날, 짐을 들이기 전에 완성된 새집으로 구니니를 데려왔다. 이동장의 문을 열자 조심스럽게 나와 주변을 둘러보던 구니니는 마치 오래전부터 이 집에서 살았던 것처럼 바닥에 드러누웠다. 우리보다도 구니니가 훨씬 편안해 보였다. 심지어 완성된 집과 구니니는 너무 잘 어울렸다. 그때 깨달았다. ‘아, 우리가 고양이 집을 지었구나.’ 그랬다. 그래서 결심했다. 구니니와 함께 살기로. 아내도 망설이지 않았다. 결국 우리에겐 새집도 생겼고 고양이도 생겼다.


사실 나와 아내는 여생 동안 아이를 낳지 않고 사는 것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이야기해왔고, 지금도 이야기 중이다. 지금의 집을 산 것도, 두 사람에게 필요한 공간으로 완성한 것도 어쩌면 그래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고양이를 입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양이 한 마리쯤은 같이 살아도 괜찮은 집이었다. 게다가 나도 아내도 고양이를 좋아하므로 우리를 불편하게 여기지 않을 고양이만 있으면 될 일이었다. 물론 아내의 알레르기도 넘어야 할 산이었지만, 구니니와 함께 산 지 어느덧 한 달 남짓이 된 지금까지 아내는 멀쩡하다. 그러니까 앞서 말했듯이 묘연이란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바람 같은 것인가 보다. 그리고 모든 우연은 결과적으로 필연이다. 수많은 고양이와 연을 맺을 기회를 건너고 건너 구니니와 닿게 된 묘연도 결국 필연이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부부가 초보 집사가 되기에 최적화된 고양이를 만난 것. 덕분에 드디어 말할 수 있다. “이제 우리도 고양이 있어.” 그렇게 우리는 완벽한 고양이 집을 완성했고, 비로소 확실한 호구가, 아니, 집사가 됐다.


('Esquire Korea' 2017년 7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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