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매일감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용준 Jan 03. 2020

2020년이 와버렸기 때문에

비록 '2020년 원더키디'는 허무맹랑해졌지만 내 삶은 흘러가므로.

1. 신은 파멸시키려는 자를 먼저 유망주로 만든다. -시릴 코널리의 <약속의 적들> 중

2. 사실 시간이란 인간이 명명하고 규정했을 뿐,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개념이다. 어쨌든 인간은 ‘시간’이란 단어를 통해 그 개념을 구체화했고, 단위를 나눠 시간을 관리하며 오늘로 왔다. 한 해라는 것은 사실상 어제와 오늘, 내일이라는 하루 단위의 삶을 묶는 큰 단위일 뿐, 특별히 그 단위에 따라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차례로 낡아지는 것도, 새로워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 해가 끝나고 새로운 해가 온다는 사실이 생성된다는 건 인간에게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부여한다. 삶이라는 단어에 환생이라는 환상성을 허락한다. 그만한 희망이 없었다면 인간의 삶이 이만큼 나아지기도 힘들지 않았을까. 누구에게나 새로운 희망을 품을 자격이 있다. 그 방아쇠가 되어줄 계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새해는 새롭고 값진 계기가 된다.

3. 12월 31일에서 1월 1일이 된다 하여 마법처럼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님에도, 단 하루의 흐름을 해의 변화라는 의식으로 치환함으로서 세상의 만인에게 새로운 기원을 허락한다는 건 어쩌면 인류 역사에서 오랫동안 유효했던 마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언젠가부터 문득 생각하게 됐다. 나이가 들어서 세상에 너그러워진 탓인지 혹은 뭣이 중헌지도 모르는 꼴로 정신이 흐릿해지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요즘은 부정보단 긍정으로, 비정보단 애정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쓰다듬으려 노력하는 이들에게서 감명을 받고 더 나은 가능성을 탐색하게 된다. 물론 여전히 밑도 끝도 없는 낙관과 희망으로 점철된 무심함이나 무례함에는 니킥을 날려 세계의 쓴 맛을 토핑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긴 하나, 날카로운 긍정과 절박한 애정을 향해 보다 먼저 손을 내밀고 싶다.

4. 지난 2019년에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한 해에 퇴사를 두 번 하게 되는 것도 참 진귀한(?) 경험이었지만 어쨌든 많은 제안을 받았고, 예상하지 못한 일들을 했고, 결과적으로 내가 바라는 삶이 어디에 있는지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을 준 이들 모두에게 깊은 고마움을. 물론 그 관계가 늘 마냥 좋고 무난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것이 나의 모자람을 감당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정을 갖고 손을 내밀어준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라는 것 정도는 깨닫는다.

5.이번 생이 망했다는 것을 제대로 깨닫게 된 20대 중반 이후로 별다른 계획을 세울 필요성을 못 느꼈지만 막연하게 마흔 살이 되기 전에는 책 한 권 정도는 내고 싶다고, 서른 살이 넘을 무렵부터 종종 생각해왔다. 그러니 서른아홉 살이 된 올해에는 계약한 책을 쓰고, 계약할 책도 쓸 것이다. 그렇다면 그나마 지난 30대가 조금이나마 무색하진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했다는 것이 생각나서 창피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하지 않을까 싶기도.

6. 사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을 싫어했다. '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정말 정색하며 싫어했다. ‘새해 복은 셀프야. 자기가 한만큼 얻는 거라고’라고 뱉곤 했다. 하지만 요즘은 그냥 한다. 빌어주고 싶다. 당신의 삶이 내년에도 행복해질 것이라고 기원해주고 싶다. 그게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걸 알게 됐다. 어차피 살다 보면 나쁜 일은 피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다들 나쁜 일보단 좋은 일이 많은 한 해가 됐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다들 건강합시다. 그리고 좀 더 잘 생겨집시다. 빌어먹을 세상에 행복함으로 복수할 수 있는 개개인이 될 수 있길 기원합니다. 그렇게 내년을 또 맞이합시다. 물론 나는 올해에도 SNS 질로 인생을 낭비할 시간이 상당하겠지만. 어쨌든 다들 새해 복 많이 당기시길.

7. 굴욕을 경험하지 못한 자는 최후 단계에서 자신에게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에밀 시오랑

매거진의 이전글 '화양영화' 심야살롱을 모집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