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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un 24. 2020

1루주자 이승엽

생애 마지막 타석에 선 이승엽은 전력질주 끝에 1루에서 살아남았다.

2017년 10월 3일, 전국 다섯 개 구장에서 2017년 프로야구 페넌트레이스 마지막 경기가 열렸다. 보통 시즌 마지막 경기란 한 시즌의 마침표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날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1위부터 4위까지의 순위가 결정되는 날이었다. 네 구장의 승패 결과에 따라 위닝시리즈부터 한국시리즈까지, 결승선의 주자들이 뒤바뀌게 된다. 그 덕분인지 시즌 마지막 경기임에도 다섯 개 구장 가운데 네 개 구장에 만원 관중이 들어섰다고 했다.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 구장에서는 다른 네 경기보다 늦은 오후 5시에 플레이볼이 선언됐다. 진정한 올 시즌의 마지막 경기였다. 플레이오프 진출팀을 가리는 순위경쟁과 무관한, 유일한 한 경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대구구장의 관중석엔 여백이 없었다. 2만4천석이 매진됐다. 올 시즌 첫 만원 관중이었다. 삼성 라이온즈는 이번 시즌 내내 최하위권에 머물며 부진을 면치 못했다. 덕분에 대구구장은 매일 같이 한산했고, 상대팀 응원가가 더욱 크게 들렸다. 그런 팬들을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다시 대구구장으로 이끈 건 바로 이승엽이었다. 이날은 이승엽의 은퇴경기가 열리는 날이었다. 그러니까 이승엽의 야구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이날 삼성 라이온즈의 모든 선수들은 등에 ‘36번’의 백넘버를 달고 그라운드에 섰다. 관중들도 이승엽이란 이름 석자와 백넘버 36번이 선명하게 적힌 사각천을 펼쳐 들고 응원했다. 그리고 모두가 보고 싶었던 진짜 이승엽의 타석은 1회말 원아웃 주자 3루 상황에서 찾아왔다. 관중들의 함성에 마음이 진동하는 기분이었다.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힌 마운드에 선 넥센의 선발투수 한현희의 공 두 개가 볼을 기록한 뒤, 해설을 맡은 양준혁이 말했다. “제가 은퇴 경기할 때에는 삼진 3개 먹었는데, 이승엽 선수는 오늘 안타라던지, 멋진 홈런 하나 때려줬으면 좋겠네요.”


한현희가 세 번째 공을 뿌렸다. 낮은 직구였다. 이승엽은 주저하지 않고 방망이를 돌렸다. 간결하고 가벼운 스윙이었지만 방망이에 맞은 공이 높게 솟아올랐다. 우측담장을 넘어갔다. 모두가 함성을 질렀다. 경기를 중계하던 해설자들도 괴성을 질렀다. 캐스터 역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 순간 전율이 오는 건 저 하나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나 역시 머리카락에서 전류가 흐르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 전율이 아니었다. 


3회말 투아웃 상황에서 이승엽이 두 번째 타석에 섰다. 관중들이 일어섰다. 이승엽을 연호했다. 이미 첫 타석에서 홈런을 친 이승엽이었다. 두고두고 회자될 은퇴경기가 될 것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승엽의 야구는 계속되고 있었다. 바깥쪽 볼을 보낸 이승엽은 한현희의 두 번째 투구에서 다시 한번 방망이를 돌렸다. 대구구장이 다시 한번 들썩였다. 중계진들까지 함성을 질렀다. 하지만 이승엽은 방망이를 든 채 고개를 들고 타구를 바라보며 1루를 향해 천천히 걸어나갔다. 연타석 홈런이었다. 놀라운 광경 앞에서 말을 잊은 듯한 중계진도 언어 대신 탄성을 내뱉을 뿐이었다. 이승엽이 베이스를 돌아 홈으로 들어올 때까지도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이승엽이 덕아웃으로 들어가서야 언어가 돌아왔다. “10월 3일 5시 49분, 야구팬은 이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한번도 이렇게 멋진 은퇴경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이승엽은 최고의 타자였다. 개인통산 최다 홈런, 최다 타점, 최다 득점, 최다 루타 등 지난 23년간 이승엽이 쌓아온 기록들은 고스란히 프로야구의 역사로 축적됐다. 이승엽은 한국 프로야구사의 첨탑에 자리한 이름이다. 하지만 이승엽을 향한 수많은 열광은 단지 그가 제일 뛰어난 선수였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일찍이 은퇴를 선언한 2017년 그 해에 이승엽은 24개의 홈런과 132개의 안타를 쳤다. 41살의 나이임에도 여전히 녹슬지 않은 기량을 과시했다. 은퇴를 한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이승엽은 자신이 은퇴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만족할 수 있지만, 나는 나에게 만족하지 못한다. 떠날 때가 됐다.” 모두가 다 이승엽의 야구가 계속돼도 좋다고 말할 때, 이승엽 스스로는 자신의 야구를 끝낼 때가 됐다고 결심한 것이다. 단순히 박수칠 때 떠난다는 의미를 넘어, 스스로가 만족할 수 없는 야구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 거기에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던 이가 끝내 넘어설 수 없었던 세월에 대한 쓸쓸함과 세월을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를 갈고 닦아온 이만이 끝내 깨닫고 인정할 수 있는 숭고함이 느껴진다.


이승엽의 마지막 경기에서 그의 연타석 홈런만큼이나 인상적인 순간은 마지막 타석에서도 찾아왔다. 8회말 노아웃 1루, 이승엽이 타석에 섰다. 두 번째 투구를 받아 쳤으나 유격수 앞 땅볼이었다. 여지없는 병살타 코스였다. 유격수가 2루를 밟고 1루로 송구했다. 송구가 떠올랐다. 1루수가 점프했고, 전력질주하던 이승엽은 가까스로 살아서 1루에 섰다. 연타석 홈런을 치고 홈으로 들어오는 이승엽보다도 전력질주 끝에 살아남아 1루에 선 이승엽의 마지막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이승엽을 최고의 타자로 만든 건 바로 그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홈런을 치고 홈으로 들어오겠다는 야심보다도 어떻게든 1루를 밟고 살아나가겠다는 의지. 최고의 선수이기 전에 최선을 다하는 선수로서, 이승엽은 자신만의 야구를 해왔다. 그리고 결국 이승엽은 1루에 서있었다. 마지막까지, 자신만의 야구를 했다. 이렇게 멋진 은퇴경기를 볼 기회는 아마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ESQUIRE KOREA'에 게재된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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