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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Aug 07. 2020

'소년 아메드' 소년은 웃지 않는다

다르덴 형제가 동시대에 던지는 새로운 질문, '소년 아메드'에 관하여. 

급하게 화장실로 들어간 소년은 문을 닫고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누군가에게 빨리 오길 재촉하는 통화를 마친 소년은 변기의 물을 내리고 화장실을 나간다. 그리고 자신을 지도하는 선생님의 질문을 가로막듯 답변하던 소년은 황급히 교실을 빠져나가며 선생님의 부름에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끝내 자신을 따라잡고 멈춰 세운 뒤에서야 선생님의 말을 듣고, 인사를 하지만 끝내 악수는 거절한다. 그리고 소년은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이슬람교도는 여자랑 악수하지 않아요.”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다르덴 형제의 <소년 아메드>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빠져든 소년 아메드(이디르 벤 아디)에 관한 영화다. <로제타> <아들> <더 차일드> <로나의 침묵> <자전거를 탄 소년> <언노운 걸>과 같이 제목부터 어느 존재를 지목하며 그 일상을 찬찬히 응시하는 다르덴 형제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소년 아메드> 역시 한 소년의 일상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을 묵묵히 따라잡고, 그 일상을 속박하고 있는 거대한 물음표를 추출한다. 관망하듯 관조하는 다르덴 형제 특유의 시선은 <소년 아메드>에서도 유효하면서도 어딘가 이례적인 인상을 느끼게 만든다.


다르덴 형제는 노동과 인권, 자본과 계급을 비롯해 이 세계에 만연한 문제들을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도 끝내 묵직하게 길어 올린 물음표의 영화를 만들어왔다. 시대를 정의하는 대신, 시대를 관통하는 질문을 던져왔다. <소년 아메드> 역시 다르덴 형제의 전작과 함께 호흡해온 동시대 관객을 향한 새로운 물음처럼 보인다. 그런 면에서 <소년 아메드>는 기존의 다르덴 영화를 잘 따라온 관객 입장에서는 소재 선택면에서 의아한 질문을 던지고 싶어지는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 벨기에에서 살아가는 이슬람 극단주의에 경도된 무슬림 소년에 대한 이야기라니, 다소 해묵은 물음표가 아닐까? 동시대 문제를 품고 화두를 던진 감독의 시선이 이젠 낡아버린 것은 아닐까?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테러 공격이 일어난 뒤, 젊은 사람들이 성전에 참여하기 위해 떠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서로 이런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항상 현재의 영화를 만들고자 노력했으니 지금 이 상황을 대면해야 해. 민주주의 사회에서 태어났지만 종교적 맹신으로 왜곡된 관점에 집착하고 사로잡힌 소년의 이야기를 말이야.'” 장 피에르 다르덴의 말처럼 <소년 아메드>는 현재진행형의 이야기다. 지난 몇 년간 서구와 이슬람의 대립은 유럽 각지에서 평범한 얼굴로 자행되는 끔찍한 테러리즘으로 확전했다. 이런 현실에 주목한 다르덴 형제의 질문은 <소년 아메드>로 구체화됐다. 하지만 <소년 아메드>의 주인공은 테러가 아닌, 제목 그대로 소년 아메드였다.


“우리는 프랑스와 벨기에에 유혈 사태를 부른 테러리스트의 공격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영화에서 어떠한 종류의 테러리즘을 묘사하고 싶지 않았다. 피를 보여주는 것보다도 그렇게 악랄한 짓을 할 수 있도록 몰아가는 것에 대한 질문에 다가가는 것이 핵심적인 이유였다.” 뤽 다르덴의 말처럼 영화는 테러의 실체를 파고들기보단 한 소년의 현재를 따라간다. 시종일관 아메드를 따라잡는 카메라는 시작부터 극단적인 맹신에 빠져든 소년의 현재를 비추고 함께 나아갈 뿐이다. 어떤 과정을 통해 아메드가 여성차별적인 관점을 갖고 쿠란을 해석했는지, 이처럼 단순하면서도 공격적인 믿음을 갖게 됐는지 그 과정을 알 순 없지만 지금 현재 소년의 상태가 왜곡된 맹신에 경도돼 있다는 것 자체만큼은 확실히 전해진다. 군더더기 없이 작금의 현실로 관객을 밀어 넣는다. <소년 아메드>는 이 소년의 생각을 지배하는 배후의 세계를 고발하는 영화라기 보단 이 소년이 처한 현실 자체에 주목하는 영화에 가깝다.

“우리는 수많은 이슬람교도 관객을 만났다. 대체로 말을 거는 건 남자들보단 여성들 쪽이었다. 그리고 여성들은 어머니 입장에서 이 영화를 봤다는 걸 알게 됐다. 누군가 화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영화를 만들 수 없다는 생각을 가져선 안된다. 어떤 사람들은 ‘무슬림인이 누군가를 죽이는 또 다른 영화’라고 말하며 이 작품을 지적할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아메드라는 소년을 단순히 이슬람교도를 대표하는 존재로 내세울 생각이 없었다.” 뤽 다르덴의 말처럼 <소년 아메드>는 특정 종교나 특정 민족 혹은 특정 사회를 겨냥한 고발극이 아니다. 제목 그대로 아메드라는 소년이 왜곡된 믿음을 통해 끝내 스스로를 어디로 밀어 넣어버리는가를 함께 지켜보는 영화적 목격에 가깝다.


영화 속에서 아메드는 좀처럼 밝은 미소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진지한 표정으로 기도를 드리고, 쿠란을 읽으며 심각하게 종교적 믿음에 몰입한 일상을 살아갈 뿐이다. 종교적 믿음 외에는 삶을 영위할 가치가 없다고 믿는 듯한 아메드의 일상은 자신이 믿는 신을 떠받드는 것 이상의 목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순수한 믿음만이 어린 소년의 삶을 밀고 나가는 동력이 된다. 그런 아메드가 지켜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물음이 드리운다. 믿음은 그 자체로 합당한가? 아메드를 시험에 들게 만드는 그 믿음은 과연 아메드만의 것인가? 이건 비단 이슬람 극단주의자만의 문제일까? 

“이것은 이슬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전 이스라엘 국무총리였던) 이츠하크 라빈은 급진적인 유대인에게 살해당했다. 기독교인들은 일정 기간 동안 불신자라 여겨지는 이들을 살해했다. 그건 그 종교가 아니라 종교에서 기인한 특수한 상황이다. 우리는 '그건 사람들이 인종차별주의자이거나 나쁜 경제 상황을 경험하기 때문이야'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영향을 미칠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는 종교의 특수성도 존재한다.” 장 피에르 다르덴의 말처럼, 인간의 이성은 오랜 세월 동안 종교적 믿음을 통해 시험대에 올랐다. 문명이 고도로 발달했다는 지금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다. 그 믿음은 결국 인류를 구원하고 있는가. 이는 단순히 특정 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어쩌면 종교의 문제도 아닐 것이다. 


‘무엇을 믿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믿으려 하는가?’의 문제, 결국 이것은 신이 아닌 인간의 문제인 것이다. 믿음을 가진 이들이 갈망하는 구원이 파멸을 부추기고, 만인이 아닌 개인의 장벽을 세우는데 보다 유용한 기도로 점철된 믿음. 그 믿음으로 인해 결국 소년은 웃지 않는다. 그렇게 신을 위해 웃음을 바친 듯한 소년의 믿음에도 신은 소년의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나락으로 떨어진 소년이 찾는 구원자도 끝내 신이 아니다. 결국 이것은 인간의 이야기다. 한 소년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우리가 늘 마주하는 진짜 신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년의 믿음이 결코 소년 개인의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듯, 소년의 현실도 결코 소년 개인의 것일 수 없다. 결국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의 끝은 이미 거기 있을 것이므로.


(네이버 영화판을 운영하는 '씨네플레이'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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