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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Nov 20. 2020

'테넷' 일어나기 전까진 일어날 일이 아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은 왜 과학적 오류를 감당하고 있는 걸까.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 단 한 번도 이름이 언급되지 않지만 엔드크레딧 상에서 주도자라는 의미를 가진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e)라고 표기된 주인공(존 데이비드 워싱턴)에게 ‘인버전’ 총알의 원리를 설명하는 과학자 바버라(클레멘스 포시)가 던지는 이 대사는 아마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에 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된 대사일 것이다. 비교적 극 초반부에 등장하는 이 대사는 <테넷>을 즐기는 관객을 위한 안내서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관객들은 회전문이 돌아갈 때마다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대체 뭘 느끼라고.’


<테넷>은 관객을 시험에 들게 만드는 영화다. 분명 뭔가 대단한 것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전하면서도 지금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서사의 흐름을 이해하기 만만치 않은 장면들이 존재하는 영화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 관객이 적지 않다는 건 일단 대다수의 관객이 <테넷>을 어렵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영화인 탓이기 때문이겠지만 그전에 <테넷>이 이해해야 할 것만 같은 매력이 있는 영화라 느끼는 덕분일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손대지 않았다면 총알은 움직이지 않았을 거예요”라는 대사처럼, 손을 댄 이상 호기심이 동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영화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일단 관련 분야의 전공자가 아니고서야 ‘핵분열에 의한 역복사’ 같은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양전자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느니, 엔트로피가 뒤바뀌어 움직임이 거꾸로 진행된다느니, 평행이론에서 의식과 다중 관점의 구별은 불가능하다느니, 할아버지 역설에 의해 과거가 사라져도 미래는 괜찮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느니, 이런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관객이 많을 리도 없고, 있다면 더욱 이상할 것이다. 그리고 <테넷>을 연출한 크리스토퍼 놀란 본인도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러니까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라는 대사가 이 모든 이론을 이해할 수 없는 일반 관객들을 위한 조언 혹은 격려처럼 느껴지는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 모든 이론이 완벽하게 유기적으로 맞물려 작동하는 초과학적인 영화가 <테넷>인가 하면 그것 역시 아닌 것 같다. <테넷>을 둘러싼 특이현상 중 하나가 과학 전문가들의 견해를 묻는 일이 많아진다는 것인데 대체로 엔트로피의 감소에 따른 시간 역행 가능성이 비사실적임을 지적하는 견해들이 일반적이며 인버전 상태에서 불이 발화한 뒤에서야 급냉각된다는 설정 자체는 <테넷>이 주장하는 엔트로피 개념을 위반하는 오류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흥미로운 건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테넷>의 과학적 진위에 관한 분석과 해설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테넷>은 과학적 이론을 정밀하게 시뮬레이션하는 영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테넷>은 실패한 영화인 걸까?

<테넷>에서 가장 기이하면서도 흥미로운 오류는 일어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일이 되는, 되감기듯 사건이 역행하는 시간 속을 순행하는 존재가 된 인버전 상태의 인물들에게 축적되는 절대적 시간이 감소하는 명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버전을 통해 서사를 되감아 들어가는 인물의 시간은 일면 거꾸로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인물이 속한 세계의 운동 방향이 순행에서 역행으로 바뀔 뿐, 인물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버전 된 인물의 세계에서 시계가 되감겨도 인버전 된 인물의 시계는 되감기는 것이 아니다. 인버전 된다 해도 해당 인물이 보내는 시간의 총량은 감소하지 않는다. 계속 축적될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상에서 인버전하는 인물들의 엔트로피는 감소하는 것이어야 마땅하겠지만 실제로는 엔트로피가 감소한다기 보단 증가하는 방향이 뒤틀린다는 인상에 가깝다. 물론 그 역시 과학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논리가 아닐 것 같지만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엔트로피 감소와 인버전 가능성의 상관관계 자체가 애초에 완벽한 과학적인 논증을 통해 태어난 영화적 이미지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이지만 <테넷>을 둘러싼 과학적 논쟁은 어떤 의미에선 무의미하고 무력한 언어처럼 보인다.


중요한 건 <테넷> 역시 그걸 그리 심각하게 여기는 영화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조금 낯설긴 하지만 그리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 회전문을 통과하는 것만으로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시간을 역주하는 인버전이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방식 자체가 그렇다. 실제로 회전문을 정밀하게 실물 제작해서 영화 촬영에 활용했다는 일화의 흥미와 별개로 회전문 자체는 영화상에서 독특할 정도로 평범하고 설득력이 떨어져서 되레 쌈박해 보일 정도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면 인버전이 된다’는 가설의 뼈대만 세워놓고 우긴다는 인상이 들 정도인데 이 정도면 실패한 설득이 아니라 의도된 방치에 가깝다. 인버전이라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득할 생각보다는 인버전 되는 과정을 하나의 요식행위처럼 제시하고 그 전후의 과정을 연결하는 방식에 집중하고 있는 인상이랄까.


그러니까 <테넷>은 과학적 이론을 증명하기 위한 상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과학적인 언어를 적극적으로 동원하고 있지만 그저 영화로서의 흥미를 강화하기 위한 수식어로서 꽤나 그럴듯한 과학적 언어를 끌어와 장식하는 효과 이상의 기대가 없어 보인다. 물론 <인터스텔라>에서도 자문가로 참여한 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 킵 손이 <테넷>을 위한 자문을 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는 게 아니다. 다만 그것이 그리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방식으로 설계된 이론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동시에 그런 과학적 언어와 이론이 그저 나열되고 휘발되는 것만은 아니다.

<테넷>은 일반적인 시간여행 영화들이 손쉽게 받아들이는 비과학적 클리셰를 보다 분명히 지적하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과거를 바꾸면 미래가 바뀐다는 설정이 언젠가부터 당연하게 여겨지는 수많은 타임 패러독스 영화와 다른 방식의 시간여행 영화를 구상하기 위해 인버전이라는 설정을 도입해 과거와 미래가 단선적으로 연결됐다는 설정에서 벗어나 수없이 분절된 평행우주의 연속으로 이뤄진 복잡다단한 타임라인의 세계로서 시간을 설명해낸다. 이는 과학의 논리와 영화의 트릭 사이 어느 지점에 착륙해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하겠다는 <테넷>의 야심을 온전히 대변하는 것만 같다. 완벽한 과학적 이론으로 잉태한 영화를 추구한다기 보단 과학적으로 그럴듯해 보이는 결괏값을 무대로 마련하고 결국 영화적 흥미를 작동시키는데 큰 관심이 있는 결과물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결국 <테넷>이 증명하는 건 과학적인 언어로 무장한 영화의 과학적 모순이 결국 영화적인 흥미를 반감시키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테넷>은 과학적 사실성과 영화적인 흥미가 인버전해도 각각의 영역에서 상승하는 엔트로피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역설 같은 SF영화다. 과학적 모순을 기반으로 쌓아 올린 이야기를 밀고 나가 건축한 결과가 흥미로운 영화로 도출될 수 있다는 근거인 셈이다. 만약 엔트로피를 감소시킬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그 방식이 단순하다 해도 그냥 회전문을 한번 돌아 나오는 것으로 가능한 기술이 미래에 있다면, 그리고 결국 엔트로피의 증감을 통해 시간의 역행을 체감하게 되는 인버전 된 인물의 시각이 순행하는 인물과 맞부딪혀 진행되는 타임라인을 목격할 수 있다면 과연 어떤 영화가 나올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통해 만들 수 있는 영화가 있다는 것이다. 과학적 오류까지 설명하는 게 영화의 몫이 아니므로. 역설적으로 그 과학적 오류마저도 흥미의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고로 영화를 만든다.


“난 방법을 알려줄 뿐, 뭘 하는지는 당신 분야죠.” 바버라가 던지는 이 대사는 <인터스텔라>에 이어 <테넷>에서도 시나리오에 관한 자문을 해준 바 있는 킵 손이 크리스토퍼 놀란에게 했을법한 조언을 인용한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진짜 지식을 통해 정밀하게 설계된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에 심취하기보단 정확한 지식을 동원해 보다 사실적으로 여겨지는 초과학적 장르 영화를 완성하는데 관심이 높아 보인다. 그런 면에서는 <인셉션>이나 <인터스텔라> 같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전작과의 유사성도 엿보인다. <인셉션>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기술 인셉션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관객에게 초현실적인 체험을 제공하는 방식은 <테넷>이 인버전을 설득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동시에 실존하는 물리학 가설을 바탕으로 역시 실존하는 미지의 영역인 우주와 블랙홀 너머의 다중우주를 초과학적으로 체감하게 만드는 <인터스텔라>처럼 <테넷>은 그럴듯한 과학적 용어를 동원해 인버전을 통해 교차하는 순행과 역행의 운동 현상을 초과학적인 체험처럼 제시한다.


그런 면에서 <테넷>이 인버전 과정을 간편하게 묘사하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테넷>이 엔트로피의 반감을 통해 시간의 역행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건 엔트로피란 무조건 증가할 수밖에 없는 에너지라는 기본적인 명제 때문이다. 결국 시간의 흐름과 엔트로피의 증가는 운명공동체와 같은 흐름으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엔트로피가 감소한다는 건 시간이 역행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 이유이며 기술이 발달한 미래에서 기술을 양도하듯 과거로 인버전해 전달한 회전문이 바로 그 불가능한 기술을 실현해주는 도구라는 것이다. 이런 방식에서는 어떤 자신감도 읽히는데 결국 저런 금속성 회전문을 들어갔다 나오는 것만으로 시간의 변화를 설득할 수 있다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게 간편하다. 아무리 고도의 기술이 발달한 미래 기술의 산물이라 해도 두꺼운 회전문에 들어가 한 바퀴 돌고 나면 시간을 역행할 수 있다니, 지나치게 간편하지 않은가. 물론 이는 그 기술이 간편하다는 것을 겨냥하는 게 아니다.

사실 <테넷>이 주는 가장 큰 의문은 인버전이라는 방식의 시간여행이 가능해지는 방식을 굉장히 사소하게 그린다는 것이다. 회전문을 엉성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관객에게 그럴싸한 쇼를 하지 않는다. 시각적인 환영술을 동원해 시간을 역행하는 과정을 보다 거창하게 묘사할 수도 있었을 텐데 반대로 굉장히 정교한 회전문을 실제로 제작하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정작 그 회전문이 제 역할을 하는 순간은 그냥 기계가 잘 돌아간다는 느낌 이상의 수작을 부리지 않는다. 인버전이라는 거창한 가상을 전시하는 영화가 정작 그 메커니즘을 간편하게 정리해버리는 것이다. 이는 <테넷>의 야심이 인버전이라는 쇼를 플레이하기 위해 작동되는 영화적 이미지에 놓여있는 것이 아님을 짐작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라는 조언은 그 지점에서부터 유효해진다.


일어난 일이 일어나지 않은 시간을 돌파하는 인물의 행위는 특정한 사건을 발생시키는 연역적 선택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결국 일어날 일을 일어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귀납적인 인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이는 <테넷>이 운명론적인 중력을 체감하는 동시에 선택적인 운명을 설득하는 양방향의 이야기라는 것을 인버전이라는 영화적 규칙을 통해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의 엔트로피를 반감시켜 시간을 역행해간다 해도 결국 나 자신에게 축적되는 총체적인 시간은 결코 줄어들 수 없고 나라는 존재의 엔트로피는 역전되지 않기에 세상의 순리에 반하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 세계의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내 시간을 써야 한다는 것. 그럼으로써 역행하는 세계에서 홀로 순행하는 존재의 운명이란 필연적으로 고립되고 고독할 수밖에 없다.


이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웅담 <다크 나이트>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는데 신분을 숨긴 채 도시의 어두운 구석에 은신한 악당들을 끌어내 양지에서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중개하는 배트맨의 면모는 고독한 반영웅으로서 <테넷>의 주인공과 흡사한 측면이 있다. 개인의 삶을 포기하고 배트맨으로서의 시간에 골몰하는 브루스 웨인의 엔트로피는 끊임없이 재생산됨으로써 해체된다. 이는 결국 자기 자신의 타임라인을 떠나 끊임없이 순행과 역행을 거듭하며 도플갱어 같은 존재가 돼서 자신이 구하고자 하는 과거로 은신하는 삶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테넷>의 주인공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닐(로버트 패틴슨)은 인버전을 통해 수없이 경로를 이탈하며 축적한 엔트로피를 고스란히 세상에 헌신하는 에너지로 치환하는 인물이란 점에서 끝내 노스탤지어의 깃발 같은 운명적 존재로서 여운을 남긴다. 수많은 평행우주로 분열하면서도 언제나 스스로를 태워버리는 존재. <테넷>의 결말부에서 전해지는 애잔함은 이 다단한 시간여행의 서사가 끝내 그런 존재의 헌신을 다층적으로 설득하는, 기이한 멜로로서의 공감대에서 비롯된다.

이 모든 과학적 의문과 인버전이라는 환영을 걷어내면 <테넷>은 앙상한 영화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기후 이상으로 해수면이 높아진 미래의 인류가 과거의 인류를 멸망시키고자 한다는 게 고작 이 치열한 시간 싸움의 이유라니 허망하게 느껴지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기이한 건 과거의 인류가 멸망한다고 해서 미래의 인류가 새로운 청사진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미래의 인류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 과거를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망가진 미래를 물려준 과거에 대한 분노를 멸망이라는 단어로 전송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 <테넷>은 현재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우리 세대가 훼손하는 지구의 재앙은 결국 우리 세대의 몫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역설. 결국 인과응보는 보다 먼 미래의 것이 될 것이라는 경고. 지금 우리 세대는 미래 세대에게 존경받지 못할 혐오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우. <테넷>이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한편으론 강력한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누군가는 과거가 미워서 지워버리고 싶어도, 또 다른 미래의 누군가는 과거가 지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결국 스스로가 무엇이 될지도 모르는 무명의 영웅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구하는 존재가 된다. <테넷>은 결국 이름 없는 영웅의 존재를 요구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영웅은 결국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중 누군가라도 상관없을 이름일 것이다. 인버전은 그런 영웅의 활동 반경을 보다 색다르게 제시하는 방법론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가 되돌려야 할 시간은 먼 과거나 먼 미래가 아닌 지금 당장의 시간이라는 실존적 비유일지도 모른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이 대사는 비관적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명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일어날 일을 주도하고 일어난다는 일의 변화하게 만드는 자가 결국 미래의 알고리즘이 될 것이다. 결국 세상을 구할, 이름을 알 수 없는 주도자란 그 누구도 아닌 우리 모두인 것이다. 그러니까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해도, 일어나기 전까진 일어난 것이 아니다. 스크린 안이든, 밖이든,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서는.


(네이버 영화판을 운영하는 '씨네플레이'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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