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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Dec 06. 2020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 오직 나를 위하여

세상의 벽을 넘어 내가 되는 춤,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에 관하여.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는 어떤 현실의 벽과 부딪히며 시작하는 영화다. 조지아 국립무용단에서 소속된 메라비(레반 겔바키아니)는 무용단을 이끄는 단장으로부터 매번 남성적인 힘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메라비와 한쌍을 이룬 마리(아나 자바히슈빌리) 역시 정숙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젊은 무용가들은 이런 지적에 웃음을 터트리지만 단장은 보수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이 춤의 전통성임을 고압적으로 주장하며 윽박을 지를뿐이다. 그런 가운데 갑자기 무용단에 합류하게 된 이라클리(바치 발리시빌리)는 귀걸이를 했다는 이유로 처음 만난 단장에게 호통부터 듣지만 곧 실력을 인정받고 메라비의 자리를 꿰차게 되고, 메라비는 이라클리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매우 소름끼치고, 부끄러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를 연출한 스웨덴 감독 레빈 아킨은 2013년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벌어진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적인 폭력 사태를 목격하고 마음이 끓어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2013년 5월 17일, 터키 접경의 동유럽 국가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성소수자들의 행진이 열렸다. 그리고 수천만의 인파가 몰려와 이들을 공격했다. 호모포비아와 트랜스포비아에 대항하는 성소수자 차별 반대의 날(IDAHO)을 기념하는 축제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를 분출하는 폭력의 장으로 돌변했다. 처음이 아니었다. 2년 동안 반복되는 그림이었다. 세계적인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에서는 조지아 공권력이 조지아의 LGBTI 운동가들을 보호하는데 큰 관심이 없다고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런 폭력적인 혐오를 부추기는 조지아 정교회를 배후세력으로 지목했다.

비록 스웨덴 국적자이지만 조지아 출신 부모 아래 자란 레반 아킨에게 조지아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결국 조지아에서 동성애 로맨스 소재의 영화를 만들자는 결심을 했다. “진부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냥 사람은 원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레반 아킨의 생각은 확고했다. 하지만 영화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은 매번 불확실성과의 싸움이었다. “조지아에서 그런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란 쉽지 않다. 대중의 반응이 두려웠다”는 주연배우 레반 겔바키아니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을 찾았다는 감독의 캐스팅 요청을 다섯 번 거절했다. 비전문배우로서 영화를 찍는다는 부담감보다 더 무서운 건 동성애 소재의 영화에 주연을 맡는다는 것이었다.


가까스로 배우를 설득했지만 조지아에서 촬영을 이어가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촬영 현장에는 늘 경호원이 대동했고, 장소 확보도 쉽지 않았고, 확보가 됐다고 해도 당일마다 게릴라처럼 이동해 조심스럽게 촬영을 진행한 후 빠르게 현장을 빠져나가야 했다. 촬영이 이뤄진 4주 동안 영화제작진은 관광객처럼 위장했고, 영화제작에 관여한 조지아의 안무가들은 엔드크레딧에서 모두 익명으로 처리됐다. 조지아 국립무용단의 협조 같은 건 애초에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은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현실을 고스란히 체감하는 과정이나 다를바없었다.

“이 영화를 배를 걷어차는 기분으로 느끼기보단 따뜻한 포옹처럼 느끼게 만드는 게 정말 중요했다.” 레반 아킨 감독은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가 폭력적인 시선에 저항하는 투쟁처럼 보이지 않길 원한 동시에 동성애자 주인공이 가혹한 현실에서 좌절하는 이야기를 보여줄 생각이 없었다. 조지아를 배경에 둔 동성애자의 영화를 만들겠다는 레반 아킨의 의도가 전통춤을 추는 댄서의 영화로 발전한 것도 그래서다. “그건 실용적인 결정이었다. 조지아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에게도 즉시 설명이 가능한 방식으로서 말이다. 조지아의 가부장적인 관습은 춤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대화가 아닌 움직임만으로도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레반 아킨의 말처럼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에서 춤이란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는 하나의 언어에 가깝다. 메라비가 남성성을 요구하는 스승의 기대에 부응하고 새로운 오디션 기회에 발탁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은 사회가 요구하는 관습에 몸을 맞추기 위한 시도에 가깝다.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모멸감을 감내하는 건 그것이 춤을 출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노쇠한 할머니와 무능력한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메라비는 무용단의 적은 월급과 식당 아르바이트 비용을 더해도 집안의 가난을 밀어내기 힘들다. 가난은 필연적으로 젊은 청년에게 구세대가 강요하는 부조리한 관습을 전통으로 떠받들고 규칙이라 수긍하게 만드는 족쇄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에 붙은 불은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그토록 견고해보이던 사회와 전통이라는 육체가 하나의 허상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한번 눈을 크게 떠버린 메라비의 욕망은 거침이 없다.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는 퀴어영화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순간부터 메라비의 개인적인 내면에 보다 예민하게 집중한다. 우울한 긴장과 무기력한 가난을 탈피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메라비의 춤은 관능적인 욕망에 보다 솔직하게 다가가는 언어로 일탈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춤에 대한 열망보다도 뜨거운 마음의 갈증에 빠져들고 방황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끝내 자신이 추고자했던 춤의 정체성을 더욱 명확하게 깨닫는 과정이 된다.


망나니 같던 형이 동생을 놀리는 친구들과 싸운 후 동생을 찾아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에서 가장 마음을 울리는 대목이다. 사회가 강요하는 관습적인 남성성의 강박에서 벗어나 서로를 온전히 하나의 인간으로서 이해해주고 안아주는 형제의 마음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형의 격려는 메라비가 공허한 상실감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다짐하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의 결말부는 그 모든 압박과 상실로부터 온전히 해방된 자만이 가능한 언어를 온 몸으로 표현해낸다. 낡은 기준에 맞춰 억눌려있던 재능이 폭발하는 결말부는 완벽한 카타르시스로 승화되며 클라이맥스에 가까운 여운을 남긴다. 소재가 지닌 필연적인 중량감을 산뜻한 쾌감으로 역전시켜 띄워올리는 날개와 같다.

<그리고 우리는 춤을 추었다>라는 제목은 이 영화의 이상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춤을 춘다는 건, 무언가를 표현해낸다는 건, 어떤 규격에 자기 자신을 맞추는 행위일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규격을 바탕으로 끝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마땅하다. 부조리한 기준에 맞춰 스텝을 밟고 불합리한 규칙에 따라 몸을 움직이는 건 죽은 언어와 같다. 그리고 자유를 방해하는 이들을 향한 저항이 자유이듯, 춤을 춘다는 건 결국 춤을 억압하는 이들을 향한 최고의 저항인 셈이다. 그렇게 우리는 춤출 수 있다. 춰야만 한다. 나라는 언어를 찾아야 한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하여. 만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폭력의 세계를 향해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으로서 온전하다는 믿음을 위하여. 그 모든 편견의 벽을 넘어서.


(네이버 영화판을 운영하는 '씨네플레이'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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