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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Dec 30. 2020

'조제' 한겨울 끝에 매달린 고드름처럼

'조제'는 자꾸 돌아보게 만드는 여운의 계절 같은 영화다.

“나는 1987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어.” 자신의 출생에 관해 고백하는 여자의 음성 그리고 이를 호기심 어린 물음표로 받아주는 남자의 음성이 차례로 들려온다. 그 위로 어딘지 모를 여느 집 안의 풍경이 찬찬히 흐른다. 지난날의 어떤 흔적을 쓸어 만지듯 집안 곳곳을 응시하는 카메라 너머의 세계는 지금이 아닌 것만 같다. 지나간 어느 시간 속에 머물고 있는 풍경처럼 보인다. 어떤 시절을 되짚듯 그렇다. 현재 진행형처럼 작동하는 풍경 사이로 조심스럽게 새어 나오듯 들려지는 내레이션의 시제는 언제나 과거형이다. 늘 회상한다. 그러니까 <조제>는 흘러간 시간 속에 여전히 머물고 있는 누군가의 심상을 되짚는 영화인 셈이다.


김종관 감독이 연출한 <조제>는 다나베 세이코의 단편소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을 영화화한 이누도 잇신 감독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리메이크한 영화다. 소설이든, 영화든 원작을 접한 독자나 관객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예상하거나 예감하는 결과가 있겠지만 필연적으로 단편소설보단 장편영화의 중력이 보다 강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원작 영화와 무관하게 <조제>는 독자적인 감정적 결과 시야의 폭을 지닌 이야기로서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다. 시대와 국적이 바뀐 만큼 인물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원작과의 차이로 확장되는 필연적 담보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조제>는 원작과 다른 곳을 응시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조제> 역시 두 남녀 주인공의 첫 만남을 부감 쇼트로 내려보지만 상대적으로 보다 너르게 프레임을 벌려 그 주변의 풍경을 함께 담아낸다. 조제(한지민)와 영석(남주혁)의 만남이라는 사건과 함께 보다 너른 세계의 정서를 담아낸다. 그런 면에서 두 인물의 만남은 하나의 사건이면서도 원작과 차별화된 <조제>의 시선을 제안하는 것이기도 하다. 멀리 빨간 라카 스프레이로 큼직하게 적힌 ‘철거’는 글자가 한눈에 들어오는 골목 어귀에는 노쇠와 가난의 흔적들이 어른어른 배어있다. 폐지와 빈병을 주워 얻은 천 원짜리 지폐와 동전을 모아 조제를 돌보는 할머니(허진)의 거친 손과 조제를 돕기 위해 찾아온 복지사의 의수 그리고 영석에게 자신이 사는 비좁은 고시원의 벽이 판자보다 얇다 말하는 후배 수경(이소희)의 멋쩍은 웃음. <조제>는 조제와 영석의 주변부에 자리한 결핍과 상실의 상을 나열하면서도 그와 함께 생동하는 삶을 하나씩 수집하듯 내보인다.


<조제>는 조제와 영석의 우연한 만남이 빚어내는 멜로로 종착하는 영화이지만 현실의 한편에 자연스럽게 내려앉은 것처럼 여겨지고 지나치던 풍경을 살피게 만드는 시선으로 가득한 영화이기도 하다. 동시에 지금 젊은 세대가 처한 처지를 찬찬히 살피면서도 그 마음을 깊이 찔러보는 시선의 영화다. 가난한 세대에게 좀처럼 허락되기 힘든 사랑이야기, 마음을 주고받기 힘든 시대에 권하는 동화 같은 사연은 그래서 보다 시리고 건조하게 시대와 현실에 밀착한다. 묵묵하고 조심스럽지만 끝내 누추한 현실의 피부를 찢고 나오는 감정은 뜨겁게 달아오르진 못해도 싸늘하게 식지만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조제와 영석의 사랑은 동화처럼 거짓말 같아서 저미고 시리지만 아름다운 것이 될 운명이다. 현실에 없는 낭만을 되뇌는 이야기는 이제 오래전에 구전되던 설화 같은 것이 돼버린 세상에서 <조제>는 기이한 멜로의 환영을 마주하는 듯한 여린 환상의 영화나 다름없다.

<조제>의 조제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쿠미코(이케와키 치즈루)에 비해 나이도 많고, 취향도 각별하다. 책을 통해 세상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지식을 축적한다는 점은 서로 유사하지만 조제는 쿠미코보다 상대적으로 나이도 많고, 나름 어른스러운 취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쿠미코는 할머니의 돌봄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를 만난다. 조제는 할머니의 돌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는 와중에 영석을 만난다. 두 작품에서 츠네오와 영석은 각각 쿠미코와 조제가 할머니의 부재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여력을 만들어주는 대체자가 된다는 점에서 유사한 역할을 맡고 있지만 그 관계로 인해 쿠미코와 조제는 각기 다른 단계의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쿠미코에게 있어서 츠네오와의 결별은 최초의 독립이다. 쿠미코는 할머니 없이 집을 나설 수 없는, 아이 같은 존재였다. 원작 영화에서 쿠미코가 할머니가 미는 유모차를 타고 외출을 한다는 설정은 그런 의미를 보조하는 시각적 은유이기도 하다. 결국 츠네오는 할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얻은 쿠미코의 상실감을 채워주는 존재에 가깝다. 그래서 츠네오와의 결별은 쿠미코가 비로소 처음 맞이하는 독립인 셈이다. 누가 밀어줄 필요가 없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홀로 외출하고 집에 돌아와 담담하게 식사를 차린다. 더 이상 누군가가 곁에 머물지 않아도 홀로 자신의 집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심신의 준비가 된 것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그래서 묵묵하게 혼자를 견디는 쿠미코의 얼굴로 끝나는 영화일 수밖에 없다. 정확하게 마침표를 찍고 관객과도 이별하는 영화인 셈이다.

조제는 홀로 길을 나서는 이였다. 집에서 나가지 말라고 역성을 내는 할머니의 성화 때문에 시도하지 않을 뿐, 틈틈이 홀로 길을 나선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좀처럼 마음을 열어본 적이 없을 뿐이다. 그런 조제 앞에 나타난 영석은 착한 심성으로 거듭 조제를 돕고, 조제의 상상을 들어주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 완전히 공감하진 못하는 것 같아도 조제의 세계를 이해한다. 그리고 영석은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조제가 책에서 읽고 상상으로 다녀왔다고 말하는 세계를 구글 맵으로 보여준다. 덕분에 빈 병의 위스키 향과 잡지 속 사진과 활자로만 떠올리던 스코틀랜드라는 세계에 진짜 한 발을 내디딘 듯한 실물의 감각을 쥐여준다. 그러니까 영석은 조제에게 있어서 더 너른 세상으로 다가오는 존재다.


영석은 조제를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배려하는 인물이다.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을 때와 달리 영석과 함께 있는 조제에게 세상은 더 이상 함부로 나가선 안 될 곳이 아니다. 언젠가 저 멀리 함께 스코틀랜드로 날아갈 수 있다는 꿈을 품게 만드는 존재다. 하지만 영석은 누군가를 보살피기엔 아직 여물지 못한 존재다. 장애와 가난 속에서도 빈 병에 남은 위스키 향을 통해 스코틀랜드를 꿈꾸는 조제와 달리 영석에게는 당장의 현실이 무겁고, 점점 버겁다. 집에만 있으면 굶어 죽고, 나가서 일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취업은 간절하다. 현실의 온도를 간과할 수 없다. 함께 있다는 사실보다 춥다는 감각이 몸에 스며든다. 보살필 수 있는 여력이 점점 비좁아진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살피던 이를 향한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버거워진다. 불투명한 현실에서의 꿈이란 불명확한 미래일 뿐이다.

조제에게 영석은 본래 불편한 사람이었다. 처음 만나는 감정이었다. 밀어낼수록 끌려가는 마음이었다. 실상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구르는 두 발처럼 뛰는 간절함이었다. 조제와 영석의 사랑은 애처로워서 아름답지만 순수해서 헤질 수밖에 없는 운명 같다. 조제의 결심은 그 운명에 대한 화답이고, 영석의 대답은 그 운명에 대한 굴복이다. 영원하기에는 계절이 다른 존재라 끝내 각자의 계절을 찾아 돌아가야 한다. <조제>는 그래서 이별하는 순간보다도 이후의 풍경을 먼저 보여주는 영화가 됐다. 영석을 어제에 두고 나아가는 조제는 눈 앞에 있는 오늘을 응시하지만 영석은 자꾸 어제를 돌아보듯 주위를 살피다 끝내 조제를 발견하고 고개를 묻는다. 이별의 상흔은 두 사람 모두의 것이었지만 모두가 다 상흔 속에 머물러있는 건 아니다. 떠나간 이는 떠나지 못했고, 떠나라 한 이는 저만치 떠났다. <조제>는 결국 이별 후 각기 다른 표정으로 살아가는 조제와 영석의 얼굴을 그렇게 함께 비추는 영화다. 떠나간 뒤에도 자꾸 돌아보고 싶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영화가 된다.


퍼석한 낯빛으로 온전히 영화의 정서를 떠받치는 한지민과 영화가 전하는 감정을 고스란히 객석으로 매개하는 말간 인상의 남주혁은 호연과 열연이라는 상투적 표현을 넘어 영화의 얼굴이자 관객의 거울로서 온전히 그 안에 존재하는 것처럼 자리한다. 그리고 언제나 사려 깊은 시선으로 세상의 내면과 풍경의 심상을 발굴하고 제시하는 김종관 감독은 지금까지의 경력 안에서 가장 무르익은 풍경과 표정을 선사하는 영화로 돌아왔다. 시선이 멈춘 자리마다 마음이 깃들어있고, 그 모든 마음이 켜켜이 쌓여 내밀한 여운으로 들이찬다. 동시에 이 모든 정서와 함께 조심스레 발을 맞추듯 나아가며 미장센처럼 느껴질 정도로 시각적으로 조응하는 음악 역시 절묘하다.

“꽃들이 죽는다. 예쁘게, 조용하게 죽는다.” 흩날리는 벚꽃을 향한 조제의 말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극성을 환기시킨다. 흩날리는 벚꽃처럼 파란 많은 기억 속에서도 살아있는 파안한 추억 하나가 삶을 살아가게 만든다. 그 끝에서 마주한 꿋꿋함도, 뒤돌린 비겁함도 삶을 내일로 밀어내는 어제가 된다는 것은 끝내 어떤 하루를 절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제 속도로 굴러가는 생을 나름의 방식으로 견디게 만들고야 만다. 그리고 떠나보낸 이가 남겨놓지 않은 어제는 떠나간 이가 남아서 맴도는 세월이 된다. <조제>는, 그런 영화다. 마치 한겨울 끝에서 지나간 계절을 붙잡듯 매달린 고드름처럼 아질하고 아련한 여운이 좀처럼 녹지 않는다.


(네이버 영화판을 운영하는 '씨네플레이'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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