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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an 21. 2021

히치콕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서스펜스의 알프레드 히치콕의 삶에 대하여

히치콕의 영화를 단 한 번도 본 적 없다 해도, 히치콕이라는 이름만큼은 한 번쯤 들어봤을 거다. 히치콕은 한 감독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의 영역을 넘어선 아이콘이다. 서스펜스를 설명함에 있어서 히치콕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새로운 시대의 거장을 논할 때 히치콕의 영향력을 언급하는 건 대체로 당연하다. 알프레드 히치콕을 이야기한다는 건 결국 영화 역사의 어떤 시작이자 전부를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히치콕은 1899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대체로 부족함이 없는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10대 시절부터 직업전선에 뛰어든 히치콕은 일찍이 전신회사의 엔지니어로 일하다 일에 싫증을 느껴 런던대학에서 운영하는 분교의 미술학과에 입학한 뒤 점차 연극과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런 어느날 즐겨보던 영화잡지에서 파라마운트 픽쳐스의 영국 지사가 런던에 스튜디오를 만들 것이란 공고를 발견한 히치콕은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미술 수업 과정에서 그린 스케치와 회사 홍보부서로 이동한 뒤 만든 사보를 비롯해 자신을 어필할만한 거리들을 정리해 보낸 영화사에 자신의 능력을 피력한 끝에 자막 카드를 디자인하는 외주 업무를 맡게 됐고, 그 뒤로도 꾸준히 재능을 증명하며 영화사에 정식 채용됐다. 그리고 자막 카드 디자이너에서 미술감독으로, 각본가로 점차 다양한 영역에서 영화감독으로서의 발판이 될 경험을 밟아나간다.

히치콕의 감독 데뷔작은 1925년에 개봉한 <쾌락의 정원>이지만 히치콕의 경력을 논함에 있어서 진정한 시작으로 일컬어지는 건 세 번째 연출작 <하숙인>(1927)이다. 히치콕 영화의 인장이 된 히치콕의 첫 카메오 출연작이기도 한 <하숙인>은 살해당한 금발 미인, 누명을 쓴 남자 등 히치콕의 남다른 서스펜스 감각 속에서도 거듭 눈에 띄는 클리셰가 원형처럼 등장하는 이 작품은 평단의 호평과 함께 대단한 흥행 성적까지 거머쥔 최초의 성공작이었다. 


그 뒤로 감독으로서 경력을 다져나간 히치콕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전환되는 영화산업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도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1934)와 <39 계단>(1935), <사보타주>(1936) 같은 작품을 발표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해나갔다. 그 명성은 대서양을 건너 할리우드까지 다다랐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57)를 제작한 할리우드의 거물 데이비드 O. 셀즈닉의 중재로 할리우드에 입성한 뒤 연출한 <레베카>(1940)는 아카데미 11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작품상을 수상한다. 


이후 수많은 작품을 함께했지만 지나치게 영화에 관여하는 셀즈닉과 결별한 히치콕은 스타 감독으로서의 지위를 활용해 작품에 대한 권한을 최대한 확보했다. 러닝타임의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의 컷으로 구성된 원신 원컷 영화 <로프>(1948)는 테크니션으로서의 히치콕의 야심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동시에 <무대공포증>(1950), <나는 고백한다>(1953), <다이얼 M을 돌려라>(1954), <이창>(1954), <나는 결백하다>(1955) 등의 작품으로 연이어지는 호평과 흥행은 히치콕에게 대중적인 인기와 막대한 부를 안겨줬다. 

1958년부터 1963년 사이, <현기증>(1958),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 <싸이코>(1960), <새>(1963)를 연이어 선보인 히치콕은 영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펀치라인을 만들어냈다. 비록 <현기증>은 당시 흥행에서는 실패했지만 그 이후로 지금까지 세계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으로 회자된다. 특히 나선형 계단의 부감 쇼트는 오늘날 영화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로 꼽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 비행기의 추격을 피하는 질주 신과 <싸이코>의 악명 높은 샤워 신 그리고 그 자체로 자연재해의 악몽을 떠올리게 만드는 <새>까지, 서스펜스의 신전을 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영화를 차례로 완성해냈다. 그렇게 대중적인 인지도를 넘어 영화 역사에서 유례 없는 영화를 연출했다고 기억할만한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후로 거장의 시간도 지나갔다. 모나코의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를 섭외하려 했던 계획이 엇나간 <마니>(1964)부터 <찢어진 커튼>(1966), <토파즈>(1969)까지, 히치콕의 경력은 빠르게 내리막길을 향했다. 평단과 대중의 반응도 싸늘했다. 만년의 작품인 <프렌지>(1972)나 <가족 음모>(1976)는 지난 세 작품보단 낫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반짝이는 재능은 옛 것이 됐다는 판정을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히치콕의 영화는 예전과 같은 영화를 누리지 못했다.


1980년 4월 29일 오전 9시 17분, 히치콕은 자신의 침대에서 눈을 감았다. 주치의는 히치콕이 지난 겨울부터 식음을 전폐하며 좀처럼 침대를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를 찾아온 지인들은 욕설을 듣고 쫓겨나기 일쑤였다. 그를 치료하러 온 주치의마저도 내쫓기기 일쑤였다. 마치 스스로 죽겠다는 계획을 세운 사람처럼 그랬다.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떠나버렸다. 삼류 영화처럼 내려앉는 삶에 경멸을 느끼고 스스로 정한 결말을 연출하듯 그랬다. 그리고 그 이후로 히치콕에 비견되는 감독은 존재했지만 히치콕을 능가하는 감독은 존재하지 않았다. 히치콕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삼성생명에서 발행하는 금융,경제 정보지 <WEALTH> 매거진 2월호에 실린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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