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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Dec 09. 2020

'퀸즈 갬빗' 삶은 이기는 것이 아니다

반짝이는 재능과 그 재능을 응원하는 세계, '퀸즈 갬빗'에 관하여

유년 시절 자동차 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보육원에서 자란 소녀 베스(안야 테일러 조이)는 지하의 관리실에서 홀로 체스를 두는 보육원 관리사에게 말을 건다. 그렇게 자신에게 말을 거는 어린 소녀 베스에게 체스를 가르치게 된 샤이벌(빌 캠프)은 이 아이가 대단한 재능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 후 체스의 오프닝 전략서 <모던 체스 오프닝>을 주고, 인근의 고등학교에서 체스 클럽을 운영하는 담당 선생님을 소개한다. 베스의 천재성을 알아본 선생은 고등학교 체스 클럽으로 베스를 초대해 학생 12명과 동시에 체스를 두는 시합을 벌이고, 1시간 20여 분 만에 모든 상대로부터 완승을 거둔 베스는 샤이벌에게 돌아와 이렇게 말한다. “실력이 너무 형편없어서 놀랐어요.”

지난 10월 23일에 공개된 <퀸즈 갬빗>은 올해 가장 성공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다. 총 7화로 구성된 이 작품은 공개된 뒤 4주 만에 무려 6천2백만 개의 계정에서 시청했고, 이는 리미티드 시리즈로 제작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미니시리즈 가운데 가장 높은 시청 기록으로 꼽힌다. 심지어 63개국에서 조회수 1위에 올랐다. 동시에 이 작품으로 인해 체스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는데 구글에서의 체스 검색은 두 배로 증가했고, 이베이에서 체스 세트를 문의하는 비율이 250% 늘었다고 한다. 심지어 세계적인 체스 게임 사이트 ‘체스닷컴(chess.com)’에 등록된 플레이어 수도 5배가량 많아졌고, 체스 세트 판매도 급증했다고 하니, <퀸즈 갬빗> 자체가 완전한 신드롬이 된 셈이다. 이는 사실적으로 고증한 체스게임의 묘사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작품 자체의 매력이 그만큼 상당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사실 <퀸즈 갬빗>은 빛을 보기까지 긴 시간을 기다린 작품이다. 1983년에 출간한 월터 테비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둔 <퀸즈 갬빗>은 1992년 원작자의 미망인으로부터 영화 판권을 구입한 스콧 프랭크와 함께 40여 년 가까운 시간을 견뎌야 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나 월터 힐 같은 감독이 물망에 오르기도 했지만 가장 유력한 감독 후보는 배우 히스 레저였다. 본래 체스에 대한 흥미가 상당했던 히스 레저는 직접 감독을 맡을 요량으로 각색 작업에도 참여했지만 모두가 잘 알다시피 <다크 나이트> 촬영 이후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고, <퀸즈 갬빗>에 관한 계획도 표류하게 됐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표적>과 스티븐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그리고 제임스 맨골드의 <로건> 등의 각본에 참여한 바 있는 스콧 프랭크의 첫 각본작은 배우 조디 포스터의 감독 데뷔작인 <꼬마 천재 테이트>였다. 일찍이 어린 천재라는 소재에 대한 흥미가 컸던 스콧 프랭크에게 <퀸즈 갬빗>은 그야말로 금광 그 자체였다. “<꼬마 천재 테이트>를 쓸 당시의 나는 너무 어려서 내가 쓰는 것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다. <퀸즈 갬빗>을 읽으면서 이것이 훨씬 더 좋은 이야기임을 알았다. 그녀가 자신의 인생을 위한 주도자이자 적대자라는 설정이 흥미로웠고, 체스라는 게임은 천재성과 함께 인물의 이중성을 드러낼 수 있는 완벽한 수단이라 생각했다.” 


영화로 기획하던 <퀸즈 갬빗>에 관한 계획이 미니시리즈로 선회한 건 2017년 넷플릭스에서 론칭한 미니시리즈 <그 땅에는 신이 없다>를 기획한 스콧 프랭크의 경험 덕분이었다. “영화라면 원작의 멋진 내용을 많이 덜어내야 했을 거다. 그래서 넷플릭스에 미니시리즈로 기획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사실 그들은 체스하는 소녀에 대한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즉각적으로 좋다는 응답을 받았다.” 그렇게 <퀸즈 갬빗>은 넷플릭스를 통해 빛을 보게 됐다. 그리고 드디어 작품을 만드는 진짜 고민이 시작됐다. 체스라는 게임을 대단히 전문적으로 묘사하면서도 단순히 체스 게임을 위한 작품이 아니라 한 여자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로 여겨지게끔 <퀸즈 갬빗>을 완성하는 것 말이다.

<퀸즈 갬빗>이라는 제목은 이러한 양방향의 목표를 모두 다 쥐고 있는 것이었다. 두 개의 폰을 차례로 전진시켜 상대의 폰과 교환하는 희생을 통해 퀸의 활로를 확보해내는 체스의 오프닝 전략을 의미하는 퀸스 갬빗은 대단히 공격적인 수다. 이는 공격적인 수를 즐기는 베스의 체스 방식을 대변하는 동시에 남성의 세계처럼 여겨진 체스 게임의 무대를 천재성을 앞세워 휘젓고 다니는 베스의 특별함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고, 장기판의 차와 같이 체스보드에서 가장 강력한 말인 퀸은 그야말로 체스의 세계에서 최강자로 발돋움하는 베스의 존재감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퀸즈 갬빗>은 군더더기 없이 시원시원하게 전개되는 이야기의 속도감이 대단한 반면 너무 쉽게 풀리는 듯한 이야기로 인해 일말의 긴장감을 느끼기 힘든 작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퀸즈 갬빗>을 비범한 인상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건 이 작품이 어떤 특별한 재능의 성공담을 그리는 데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재능을 응원하는 주변인의 마음을 그린다는 데에 있다. 남다른 애정이 느껴지지 않던 양어머니가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가 되고, 꺾어야 할 적이었던 라이벌들이 각별한 조언자로 거듭나고, 유년 시절 고아원에서 의지했던 친구는 성인이 돼서 찾아와 예상치 못한 도움을 준다. 7부작으로 구성된 시리즈는 천재소녀의 성공을 밀고 나가는 여정이기도 하지만 그 성공을 밀어 올리는 주변인들의 계주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편 <퀸즈 갬빗>은 체스판을 두고 벌이는 경쟁을 선악의 무대로 만들지 않는다. 물론 간혹 차별적인 멸시나 경멸을 던지는 이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런 인물은 그리 중요하게 다뤄지는 법이 없다. <퀸즈 갬빗>은 베스를 선으로, 그 맞은 편의 상대를 악으로 치환하는 작품이 아니다. 체스 보드 앞에 앉아 말을 움직이는 모든 이들은 그저 자신의 체스를 둘뿐이다. 동시에 체스를 두지 않는 이들도 자신의 인생을 살뿐이다. 그 사이에 남다른 재능을 가진 한 사람이 자리할 뿐이다. 그리고 그 빛나는 재능은 스스로 발광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 재능을 아끼는 이들이 마음을 비추어 반짝이게 만드는 것이었음을 깨닫는 삶으로 거듭난다. 그럼으로써 베스의 성장과 방황이 거듭되는 6화까지의 여정은 이 작품의 관객을 베스의 주변인으로 치환하는 것만 같다. 단순히 결말을 목도하는 관객이 아니라 원하는 결말을 함께 응원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오랜만에 자신에게 처음 체스를 가르친 샤이벌의 지하실을 찾게 된 베스는 자신의 시작점이기도 한 그곳에서 자신이 지금 서있는 곳을 보게 된다. 자신의 재능이 온전히 자신만의 성취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성취를 헛되지 않게 만드는 것임을 알게 된다. 돌아갈 곳이 없을 때에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되새긴다. 딱히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퀸즈 갬빗>의 결말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건 그래서다. 예상 가능한 끝이 아니라 모두가 원하는 결말, 끝내 자신이 꿈꾸던 성취에 다다른 베스는 그 자리가 결국 처음 체스를 배우던 그 지하실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높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궁극의 목표이자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누군가의 말을 쓰러뜨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계속 말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삶이란 것이 무언가를 희생하면서 이겨야 하는 승부가 아니라는 것을. <퀸스 갬빗>의 엔딩은 그래서 끝이 아닌 시작이다. 그 모든 것을 깨달을 자에게 허락된 첫 번째 말, 삶은 결국 그렇게 계속되는 것이다.


('예스24'에서 운영하는 패션 웹진 <스냅>에 연재하는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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