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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Oct 14. 2020

'보건교사 안은영' 이상해도 괜찮아

우리에게는 더 많은 '보건교사 안은영'이 필요하다.

보건교사 안은영(정유미)은 젤리의 형상으로 다가오는 불길하고 음험한 존재들을 향해 무지개색 플라스틱 검을 휘두르고 투명한 비비탄총을 격발한다.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고, 남들 모르게 세상을 구하는 운명을 타고난 이에게 삶이란 비범하기보단 구차한 것이다. 매일 같이 세상을 구하고, 사람을 구해도 영웅이 될 운명과는 거리가 먼 팔자다. 능력이라기보단 저주에 가깝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허공의 멱살을 잡듯 내뱉는 넋두리뿐이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돕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씨발.” 

정세랑 작가의 동명 원작 소설을 극화한 <보건교사 안은영>은 <미스 홍당무>와 <비밀은 없다>를 연출한 이경미 감독의 첫 시리즈물이자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라는 점에서 제작 단계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보건교사 안은영>의 장르를 명랑 판타지 오컬트 성장드라마라고 부르고 싶다”는 이경미 감독의 말처럼 <보건교사 안은영>은 복잡다단하게 뒤엉킨 장르적 특징을 명랑 쾌활하게 돌파해나간다. 학교를 배경에 두고 있지만 일반적인 학원물의 분위기와는 판이하면서도 그 활기만큼은 온전히 끌어안은 작품이랄까.


그 비결은 무엇보다도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캐릭터 보건교사 안은영을 비롯해 개성 넘치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덕분이다. 십자가와 불상, 부적 등 영험해 보이는 물건들로 가득한 캐비닛의 주인인 안은영은 어려서부터 생사의 경계에 놓여있는 영혼이나 요괴를 보며 자랐고, 그것들이 젤리 같은 형태로 사람의 주변에 나타나 해를 끼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것들을 퇴치해야 하는 운명을 떠안고 살아간다. 그렇게 인생에 하등의 도움이 안 되는 무용담을 펼쳐오던 안은영의 기운을 이해해주는 한 사람이 비로소 등장한다. 


좀 특별한 기운을 타고난 한문교사 홍인표(남주혁)는 학교를 설립한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자신이 물려받은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재직 중이다. 그는 우연한 계기로 안은영과 함께 학교 지하실에 은폐된 어두운 비밀을 탐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믿기 힘든 일을 경험하면서 안은영의 능력을 믿게 된다. 그리고 학교를 안전하게 지키기 안은영에게 종종 특별한 기운을 나눠주며 적극적인 조력자가 된다. 

퇴마사라는 설정을 엉뚱하게 비튼 정세랑 작가의 <보건교사 안은영>은 읽는 맛이 상당한 소설이다. 안은영이 처한 현실이 그리 평범하진 않지만 그 범상치 않은 일상에 깃드는 감정이란 지극히 보편적이라 되레 다정한 감정이 읽혀 끝내 무덤덤한 얼굴로 낭만적인 온기를 전해주는 작품이다. 반면 이경미 감독의 <보건교사 안은영>은 소설보다 인위적인 장치들과 위악적인 태도로 무장하며 온 몸으로 평범함을 거부하듯 판타지를 강화하는 인상이다. 기괴하지만 아름답고, 다채롭지만 명쾌한 미장센만큼이나 때때로 광기처럼 보일 정도로 과장된 연기를 구사하는 배우들의 인상도 그만큼 신선하게 느껴진다. 


6부작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보건교사 안은영>은 소설의 내용을 기본적인 밑그림 삼아 재구성하면서도 덜고 더하는 각색의 묘미가 상당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특히 원작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홍인표의 할아버지를 둘러싼 의혹을 가중하며 학교의 비밀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6부작의 큰 줄기로 마련한다. 그리고 원작에 존재하지 않았던 화수(문소리)를 등장시키고, 원작에 비해 원어민 영어교사 매켄지(유태오)의 존재감을 보다 두드러지게 제시하는 등 일부 캐릭터의 설정과 관계를 변형하며 개별적인 에피소드의 개성을 뾰족하게 세우면서도 각각의 에피소드를 잇는 시리즈물의 유기적 흐름을 적절하게 이어나가는 인상이다. 

동시에 소설에서도 인상적이었던 몇몇 에피소드는 드라마에서도 특유의 빛을 발하는 인상인데 옴 잡이 백혜민(송희준)과 안은영의 오래된 친구 김강선(최준영)이 등장하는 4화와 5화 에피소드는 개별적인 캐릭터에 관한 사연뿐만 아니라 사회의 어두운 한 구석을 따듯하게 조명하는 배려심이 돋보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과 희생을 선택이 아닌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유독 안은영 곁에서 눈에 띄는 건 안은영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오는 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있지 않은 것을 보는 이가 살아있음에도 소외된 이들을 보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보건교사 안은영>은 남다른 방식으로 필요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뿅망치 같은 자극제 같다.


이경미 감독 특유의 괴상한 활기가 곳곳에 넘치는 <보건교사 안은영>은 보기 드문 여성 캐릭터를 그려낸다는 점에서도 반가운 작품이다. 헌신적인 면모로 세상을 구하는 강인한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눈에 띄니 외면할 수 없는 박복한 팔자를 타고난 탓에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안간힘을 쓰는 보건교사. 꽥꽥거리며 학교를 배회하는 오리처럼 이상하지만 잊을 수 없는 감각이 이 작품에 분명 있다. 그건 분명 남다른 특별한 재능이다. “나쁘지 않으면 평범한 것보다 이상한 게 좋다”는 대사처럼, 어쩌면 우리에게는 더욱 이상한 것을 만날 기회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더 많은 안은영을 만나고 싶다. 이경미 감독의 남다른 세계를 또 한 번 고대한다.


('예스24'에서 운영하는 패션 웹진 <스냅>에 연재하는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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