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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Dec 30. 2020

'스위트홈' 무서운 건 괴물이 아니다

'스위트홈'은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낡고 허름한 아파트에 한 소년이 이사 온다. 가족도 없이 혼자 사는 듯한 소년은 어딘가 주눅이 든 인상인데 막 입주한 집보다도 다른 곳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다. 그곳은 바로 옥상, 소년은 아파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갈 참이다. 도시의 풍광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소년은 죽고 싶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만남으로 인해 계획은 보류된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게임이나 하며 쳐박혀 지내던 소년은 갑자기 문 앞으로 찾아와 도움을 청하며 문을 열어달라는 옆집 여자에게서 이상한 기운을 느낀다. 그리고 곧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게 된다.

지난 12월 18일에 공개한 <스위트홈>은 김칸비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둔 10부작 드라마다. 한국형 좀비물을 표방한 <킹덤>처럼 한국형 크리처물을 표방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다. 회당 30억 원에 달하는 제작비가 투자된 대작이기도 하다. 갑자기 괴물로 변한 사람들로 인해 아파트에 갇힌 채 생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삶을 그린다. 사실 작품에서 묘사하는 현상이 지극히 논리적이진 않다. 개개인의 욕망이 방아쇠가 돼서 끝내 사람이 괴물로 변이 된다는 설정은 밑도 끝도 없다. 설정의 결과만 존재할 뿐 그렇게 변할 수 있는 근원적인 이유를 설명하기란 불가능해보인다. 내러티브가 결여된 상황이라는 결과값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든 시청자 입장에서는 작품 자체를 소화할 동기를 찾기 어려울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 자체를 하나의 우화적인 설정으로 받아들인다면 보다 흥미롭게 작품의 흐름을 따라갈 가능성도 충분하다. <스위트홈>에 등장하는 크리처, 그러니까 괴물은 저마다 형태가 다르다. 이는 개개인이 품은 욕망이 각기 다르고, 망의 세기도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이 욕망하고 갈구하는 것에 대한 갈망이 괴물로 변이 된 이후의 형태에 각기 다른 양상으로 적용된다. 그러니까 극복하고 싶었던 결핍이나 다다르고 싶었던 이상이 괴물로 변한 신체의 형상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운동에 중독된 사람은 거구의 근육질 괴물이 되고, 관음증이 있는 사람은 거대한 눈알을 가진 괴물이 된다. 심지어 머리카락이 없던 사람은 온몸에 치렁치렁한 털을 가진 괴물이 된다. 결핍과 욕망이 유의어가 되는 세상의 비극을 목도하는 셈이다.


“인간 모두가 지닌 욕망이란 소재를 대입하면 흥미로울 것 같았다”는 원작자 김칸비 작가의 말은 <스위트홈>에서 주목해야 할 흥미가 괴물 그 자체에만 놓여있는 것이 아님을 확신하게 만든다. 오히려 괴물이 된 이후에도 괴물이 되기 전의 인간이라는 근본적 욕망이 두드러진다. 그러니까 <스위트홈>은 일종의 우화다. 괴물과의 사투는 이 작품의 내러티브를 돕는 강력한 피처링에 가깝다. 중요한 건 결국 그런 상황 속에 놓인 사람들이다. 괴물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괴물처럼 구는 인간들 그리고 그런 이들과 달리 헌신적인 역할을 해내고야 마는 인간의 상반된 모습이 <스위트홈>을 흥미롭게 만드는 중요한 요건이나 다름없다. 인간은 미래이기도 하지만 저주이기도 하다.

극후반부로 갈수록 주인공 차현수(송강)의 심리 상태가 감상을 좌우하는 주요한 요소로 작동하지만 서이경(이시영)을 비롯해 편상욱(이진욱), 정재헌(김남희), 윤지수(박규영), 이은유(고민시) 등 전반적인 캐릭터에 대한 인상을 확실히 각인시키며 감상의 흥미를 점차 너르게 확보해나간다. 모든 캐릭터에 대한 인지가 어느 정도 정리 된 3~4화 이후부터는 개별적인 캐릭터의 서사와 전체적인 극의 서사를 입체적으로 교차시키는 데 성공한 인상이라 극적인 몰입도도 높아진다. 크고 작은 설정에서의 다소 헐겁게 느껴지는 디테일의 약점이 부분적으로 발견되긴 하지만 제각각의 캐릭터들이 제 역할을 해내고 이를 통해 내러티브가 점점 입체적인 양상을 띄게 되면서 극적인 흥미가 증폭돼 단점을 보완한다. 흐름보다는 세기로 뚫어가는 인상이랄까. 매너리즘이 오기 이전 시즌의 <워킹데드>처럼 개별적인 캐릭터를 쫓아가는 흥미가 상당한 작품인 셈이다. 이는 나이와 경력을 떠나 모든 배우들이 자기 역할을 제대로 완수하며 자기 비중에 걸맞은 존재감을 드러내는 덕분이기도 하다. 특히 발견에 가까운 낯선 배우들의 좋은 자질을 더러 발견하게 된다는 것 역시 이 작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신선한 흥미에 가깝다.


<스위트홈>의 볼거리라 할 수 있는 크리처 디자인은 대단히 신선하게 다가오는 편은 아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디자인이 남발되는 건 아니지만 그 형태 자체가 신선한 공포를 선사하는 성취로 다다르는 것 같진 않다. 적확하게는 무섭다기 보단 대체로 불쾌한 디자인이다. 압도적인 인상이 약하다. 다만 국내에서 보기 드물게 완성도 높은 디테일과 만만치 않은 규모의 스케일을 자랑하는 크리처물을 완성했다는 것 자체로서의 의미는 상당해 보인다. 심지어 국내에서 이런 크리처 특수분장을 제대로 해본 사례를 가진 업체가 없기 때문에 해외업체까지 알아봐야 했다는 이응복 감독의 변은 그런 고충을 여실히 느끼게 만든다. 결국 이러한 장르물에서는 이러한 경험 자체가 하나의 자산이 되므로 <스위트홈>이 이 이후로 유사한 작품을 구상하는 감독 혹은 작가에게는 상당히 실효성 있는 전례가 될만해 보인다. 게다가 지금의 화제성을 염두에 둔다면 시즌2를 암시하는 결말부의 청사진도 상당히 밝아 보이는 만큼 보다 너른 세계로 확장된 크리처물로서의 발전도 가능할 것이다.

한편 <스위트홈>은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한국형 오리지널 시리즈의 지향점에 대한 궁금증을 자극하는 결과물이기도 하다. <킹덤>과 <인간수업> 등 근래 한국에서 제작한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시리즈는 대체로 폭력적이거나 잔혹한 묘사가 상당하다. 각기 다른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고, 작품마다의 지향점도 다르지만 대체로 잔인하고 냉혹한 현실을 바탕에 둔 장르물이 거듭 등장하고, 화제를 모은다는 건 이런 류의 작품을 소비하는 것을 즐기는 시장의 내면을 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지금 한반도에서 콘텐츠를 제작하거나 소비하는 이들이 가장 공감하는 건 <킹덤>이나 <인간수업> 혹은 <스위트홈>처럼 장르물의 탈을 쓴, 관계에 대한 공포와 혐오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좀비든, 크리처든, 괴물은 거들뿐, 사람이 제일 무섭다. 사람이 문제다. 드라마에서도, 현실에서도, 언제라도 그러하듯이.


('예스24'에서 운영하는 패션 웹진 <스냅>에 연재하는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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