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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Dec 23. 2020

기억하지 않는 실수는 반복된다

'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의 설민석과 제작진이 간과한 것들에 대하여. 

12월 20일 오후 2시쯤 포털사이트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 1위에 오른 건 클레오파트라였다. 21세기 대한민국 사람들의 관심이 기원전 이집트의 여왕에게 쏠린 건 바로 전날에 방송된 한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유명한 역사 강사 설민석이 진행하는 <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 2화 분량 때문이었다. ‘히스토리 에어라인’이라는 테마로 전 세계 곳곳의 명소를 언택트로 둘러보며 관련 역사를 들여다본다는 콘셉트를 매회마다 각기 한 나라의 역사를 설명하는 강연식 예능 프로그램이다. 클레오파트라를 화제의 인물로 만든 2화는 바로 이집트 편이었다. 


논란은 SNS를 통해 시작됐다. 해당 방송이 끝난 자정쯤 프로그램의 문제를 지적하는 글 하나가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이집트 고고학자 곽민수 소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실관계 자체가 틀린 것이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언급하기가 힘들 지경’이라며 설민석의 설명 가운데 잘못된 사실 몇 가지를 지적했다. 정리해보자면, 설민석이 직접 그린 지도에 오류가 있으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알렉산드로스가 아닌 프톨레마이오스 2세 때 세워졌다는 것 그리고 줄리우스 카이사르가 했다는 유명한 발언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에 관한 정황 설명까지 적지 않은 오류가 있다는 것이 글의 요지였다.


가장 큰 화제를 모은 클레오파트라 같은 경우는 사실 관계를 틀렸다기 보단 비유의 실패로 인한 사실 왜곡처럼 보인다. 2화에서 게스트로 나온 이집트 국적 방송인 새미 라샤트가 우리가 아는 클레오파트라가 클레오파트라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하자 클레오파트라를 복수형으로 언급한 것에 대해 주변의 게스트들이 의아해한다. 그래서 새미 라샤트가 우리가 아는 클레오파트라는 클레오파트라 7세이며 이집트 왕조의 클레오파트라는 7명이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을 부연했다. 그런데 이때 설민석이 이를 ‘단군’이라는 칭호와 동일한 개념이라고 첨언한 것이 문제였다. 이는 루이 14세를 14번째 왕 정도로 갖다 붙여 버린, 틀린 비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냥, 망했다. 세계사가 벌거벗을 줄 알았는데 설민석과 프로그램이 벌거벗어버렸다.


일단 설민석의 틀린 설명들은 포털사이트에서 검색만 해도 사실관계를 판단할 수 있는 자료가 적지 않다. 너무 유명해서 ‘카르페디엠’과 함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에 문신을 새길 문구로 선택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카이사르의 명언은 활자 그대로 포털사이트에서 검색만 해도 알렉산드리아 전쟁이 아닌 파르살루스 전투와 연관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지금 당장 스마트폰으로 검색만 해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이름난 베테랑 강사가 이렇게 기초적인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게다가 방송에서 말이다. 물론 설민석이 포털사이트 한번 검색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지식 전문가가 포털사이트로 지식의 진위를 판별한다면 그게 더 문제일 거다.


운동선수의 기술적인 실수는 연습부족에서 비롯되듯, 지식을 파는 강사의 실수는 공부 부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설민석의 실수는 모르는 내용을 이야기하다 보니 걸린 과부하 현상처럼 보인다. 그는 원래 한국사 강의로 유명세를 얻었고, 방송에서도 해당 분야를 통해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역사와 관련된 인문학 방송을 한다 하면 설민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문제적 남자>에서는 일제가 석굴암을 고의로 훼손했다는 발언을 해서 잘못된 사실관계에 대한 논란을 부른 바 있고, 일제강점기에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을 선언한 태화관을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이라 정의하며 논란이 되자 뒤늦게 자신의 실언을 사과한 바 있다.


설민석은 연기력이 뛰어난 달변가다. 그가 대중을 사로잡은 건 폭넓은 역사 지식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말할 때 동원하는 제스처와 표정의 힘에서 기인하는 바도 크다. 연극적인 몰입도가 뛰어난 연사다. 문제는 그는 배우가 아니라 강사라는 사실이다. 선생이다. 그러니까 그가 동원하는 제스처와 표정은 결국 그가 말하는 사실에 잘 이입하도록 유도하는 촉매에 가깝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이 어긋나고 있다. 문제는 그가 자꾸 틀린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더 나쁜 버릇이 느껴진다. 그가 역사로서의 사실을 전달하는 것보다도 역사를 가십처럼 이야기하는데 열중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역사를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를 가십으로 포장해 왜곡을 일삼아 버리면 문제가 된다. 


<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 2화가 이집트를 다루면서 클레오파트라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도 설민석 특유의 역사 가십 만들기 기술에 동원하기 좋은 캐릭터이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클레오파트라는 희대의 캐릭터를 소재로 삼은 게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이집트를 이끈 최고 통치자이기도 했지만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안토니우스와 같은 로마의 최고 권력자를 애인으로 갈아치운 전력만으로도 대중을 솔깃하게 만들 떡밥임에 틀림없으니 방송 소재로는 딱이다. 게다가 카이사르라는 아이콘까지 함께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러니까 결국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기원전 인플루언서의 스캔들을 떠들썩하게 이야기할만한 소재라 여겨졌을 것이다. 문제가 된 2화 전에 방영된 1화에서 독일을 다루며 나치와 홀로코스트를 선택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문제는 결국 사실 관계를 틀렸다는 사실이다. 지식 전문가가 이끄는 프로그램에서 전문지식을 왜곡했다는 건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방송사고나 다름없다.


역사를 재미있게 설명하며 해당 분야의 관심을 고취시키고, 알아야 할 것을 알게 만드는 건 중요한 일이다. 대중을 사로잡는 힘이 센 연사가 이런 취지를 설득할 수 있는 역할을 한다는 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잘못된 사실을 강력하게 주입한다면, 왜곡된 역사를 사실로 여기게 만든다면, 심지어 그것을 타블로이드 매체의 가십처럼 다뤄서 만인의 웃음을 유발한다면, 이건 정말 괜찮은 일일까? 그냥 한 번쯤 해본 실수라고 수긍해도 되는 것일까? 심지어 실수가 한 번에서 멈추지 않고, 점점 더 잦아지고, 커지는 상황이라면, 그의 말을 듣는 의미란 무엇일까? 사실 관계 따위는 상관없고 그저 재미있으면 된다는 것일까?


그러니까 여기서부터는 방송을 만드는 제작진이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언제부턴가 방송가에서는 설민석이 나와서 역사 이야기를 하면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팽배해진 것 같은데 그 결과가 <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 같은 상황을 만든 것이다. 설민석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제가 많이 부족하고 모자라서 생긴 부분’이라며 ‘모든 잘못은 저에게 있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지식을 전하는 것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 지식을 왜곡했으니 잘못한 게 맞다. 하지만 모든 잘못은 과연 설민석에게만 있을까? 해당 방송에 관여하는 PD와 작가를 비롯한 제작진의 책임이란 묻지 않아도 된다는 걸까? 그럴 리가. 


설민석의 실수는 결코 개인만의 실수가 아니다. 방송은 사전제작부터 촬영, 편집 등의 단계를 거쳐 끝내 안방으로 송출된다. 시스템 안에 오류를 수정하거나 삭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문제는 그런 기회를 대체로 활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작진은 시간상 혹은 인원 문제로 그럴 여유 없이 힘들고 빡빡한 여건 안에서 진행되는 환경에 놓여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런 오류가 생길만한 프로그램을 기획해선 안 되는 것 아닐까? 그저 설민석이 모든 것을 다 해줄 것이라 믿었던 걸까? 1화 방송에서 설민석은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다루면서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라고 말했다. 결국 잘못 기억된 역사 또한 반복될 것이다. 이는 결국 <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를 만드는 설민석과 제작진을 위한 조언처럼 보인다. 잘못을 기억함으로써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럼으로써 스스로가 잘못된 역사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 기억하지 않는 실수는 반복되는 법이므로.


('예스24'에서 운영하는 패션 웹진 <스냅>에 연재하는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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