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유희사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용준 Jan 05. 2021

보건교사 안은영처럼 씩씩하게

피할 수 없으면 그냥 부딪히는 것이다. 보건교사 안은영처럼

“나는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돕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씨발.” 쌍시옷 발음을 찰지게 뱉는 안은영은 팔자가 사납다.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젤리 형상의 불길하고 음험한 존재들을 퇴치하며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구하느라 늘 애쓰지만 정작 구원을 받는지도 모르는 타인들에게 안은영은 그저 특이한 사람일 뿐이다. 미취학 아동이나 갖고 놀 법한 무지개색 플라스틱 검을 허공에 휘두르고, 투명한 비비탄총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면 덜 자란 사람 같기도 하다. 그야말로 이번 생은 망한 슈퍼히어로인 셈이다. 


능력이라기보단 저주에 가까운 운명을 타고난 안은영이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운명에 몰입하는 건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직성이 풀리는 팔자를 타고난 탓이다. 사실 누구도 그에게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모른 척할 수 없는 성정을 가진 탓에 입으로는 쌍욕이 나와도 이미 발은 세상을 구하러 뛰고 있다. 고매하고 강직한 이상을 추구해서가 아니라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벌어지는 걸 눈감을 수 없으니까. 남들과 다른 특별한 삶이라는 건 그저 피곤하고 귀찮은 일의 연속일 뿐이다.


혹시 매일 같이 행복하고 풍요로워 보이는 삶을 전시하는 SNS 너머의 타인들과 자신을 비교한 적 있는가? 아니면 자신보다 나아 보이는 이상적인 자아를 포스팅하며 누군가의 선망을 받길 기대하는가? 만약 자신의 일상이 너무 가볍게 여겨져 자신의 인생을 가엾게 여기는 이가 있다면 보건교사 안은영을 처방해주고 싶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스스로 타고난 인생을 원망해도 누군가의 인생을 선망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도 씩씩하게 자기 삶을 살아간다.


“직장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늘 있지만 그렇다고 딱히 갈 곳도 없다. 그래도 여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꽤 의미 있는 것 같다. 이런 걸 보람이라고 하는 걸까?” 안은영은 끝내 자신의 빌어먹을 인생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아낸다. 결국 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에 당당하게 맞선 자에게만 주어지는 온전한 자존감이 있는 법이다. 저마다 생긴 대로 사는 법이라는 말도 해석하기 나름이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가 바라보는 거울 속 자신은 결코 멋질 수도, 예쁠 수도 없는 법이니까. 


당장의 삶이 불만족스럽다 해도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으로서 세상과 대면해야 한다. 타고난 팔자가 기구할지언정 스스로 자신을 기구하게 여기는 존재가 돼선 안 된다. 윤택해 보이는 타인의 삶에 비춰 스스로를 하찮게 여겨선 안 된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내가 있기 때문에 오늘도 세상이 돌아간다는 자뻑이라도 좋겠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길 필요까진 없어도 해낼 필요는 있다. 그리고 안은영처럼, 시원하게 육두문자라도 날려보는 거다. 그 누구도 아닌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씩씩하고 강건하게.


('GQ KOREA' 2020년 1월호에 게재된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위트홈' 무서운 건 괴물이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