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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Feb 09. 2021

코로나 시대에 만난 두 얼굴

<킹덤>과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거쳐 마주한 코로나 시대의 양면성.

2020년 12월 31일에 문득 1999년 말의 풍경을 떠올렸다. 새로운 한 세기가 열린다는 기대감과 공포심에 인류가 사로잡힌 시간이었다. 21세기에는 자동차가 날아다닐 것이라는 류의 테크놀로지 판타지가 신문 기사의 진지한 전망으로 게재되던 시절이기도 했다. 한편으론 Y2K, 일명 밀레니엄 버그로 인해 전 세계적인 컴퓨터 오류가 발생하며 거대한 혼돈을 맞이할 것이라는 테크놀로지 묵시록이 제법 진지하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2000년의 문턱을 넘은 이후 세상에는 크고 작은 변화가 찾아왔지만 20세기 말에 품었던 기대나 걱정과는 분명 다른 세계였다.


2000년이라는 시간으로 수렴하던 각양각색의 기대감과 불길함은 사실상 2000이라는 숫자 자체에 대한 기이한 감각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딱 떨어지는 완결성을 지닌 원년 같은 숫자. 앞으로 1000년이 또 지나지 않으면 결코 만날 수 없는 상서로운 숫자의 해라니, 뭔가 그럴듯한 의미를 붙이거나 예언을 하고 싶지 않겠는가. 1999년에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 예언했다는 노스트라다무스의 그럴듯한 ‘썰’이 지구를 돌고돈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거다. 9가 무려 셋이나 모인 해라니, 불길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 않는가. <2020 우주의 원더키디> 같은 만화가 2020년을 선택한 것도 비슷한 논리였을 것이다. 반복 나열된 두 숫자로 딱 떨어지게 조합된 근미래 시제라니, 제목에 붙이기 근사하지 않은가.


그래서였을까. 2020년은 두고두고 회자될만한 한 해가 됐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 전 세계 어디라도 날아갈 수 있는 시대에 국경을 폐쇄하고, 지구 반대편에서 살아가는 누군가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옆 사람과의 접촉을 지양하길 권하는 집단 경험이 시작된 것이다. 이게 다 ‘글로벌이 아닌 로컬’ 발언을 한 봉준호 감독의 저주가 아닐는지 음모론을 제기하고 싶을 정도로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한 해였다. 눈부시게 발전한 현대 과학을 등에 업은 인류가 그깟 바이러스 때문에 발이 묶이게 되리라고, 마스크를 쓰지 않고 거리를 활보할 수만 있어도 좋겠다는 바람이 네 개의 계절이 바뀔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아무도 몰랐다. 누구에게나 처음 만나는 세계였다.


그러니까 벌써 1년여 전에 시작된 일이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일상이 하나씩 흩어져버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 것이 말이다. 2020년 2월부터 국내에서도 본격적인 유행이 시작된 코로나 19가 야기한 팬데믹 상황은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용어와 마스크로 가린 얼굴을 비롯해 생소하기 짝이 없던 언어와 풍경을 일상으로 정착시켰다. 누군가 인피니티 스톤을 모은 건틀렛을 손에 끼고 지구인의 일상 절반을 날려달라고 손가락이라도 튕긴 것처럼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규정됐다. 사실 인류를 위협하는 대재앙은 혼란스럽고 떠들썩하게 펼쳐질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차분하고 고요하게 기울어가는 배에서 지루하게 대기하는 듯한 일이 될 줄은 몰랐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구조선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기분으로 지난 1년을 보낸 것이다.

“<킹덤>은 집을 나온 세자 이창이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이야기이고, 그 과정에 힘든 역경이 있는 이야기다.” 김은희 작가의 말처럼 <킹덤>은 왕세자 이창의 ‘오디세이아’다. 역경을 뚫고 집으로 돌아가는 영웅의 귀환을 그린 이야기다. 마치 우리가 코로나 이전의 시간을 그리며 지금을 견디듯이 세자 이창 역시 집이나 다름없는 도성 한양의 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을 가로막는 갖은 세파와 맞선다. 귀한 신분의 왕세자가 궁을 떠나 먼 길을 온 건 밑도 끝도 없는 재앙의 뿌리를 캐기 위해서다. 멀쩡한 사람을 살아있지도, 죽지도 못한 ‘생사역’으로 만드는 역병의 근원지로 추정되는 동래에서 문제의 근본을 밝혀내기 위해서다. 코로나 19의 감염경로를 추적하는 질병관리청의 역학조사관처럼 역병의 흐름을 좇아 근본적인 시작점을 들여다보고자 함이다.


2020년 3월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킹덤> 시즌2는 그 이후의 세계를 다루는 속편이다. <킹덤>을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이야기’라고 한 김은희 작가의 말을 근거로 보자면 시즌2가 <킹덤>의 본격적인 시작인 셈이다. 왕세자 이창의 귀환을 가로막는 건 정체불명의 역병만이 아니다. 역병을 이용해 세상을 어지럽혀서라도 왕권을 차지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탐욕스러운 인간이 생사역보다도 더 넘기 힘든 장애물이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서 괴물만큼이나 흉악한 욕망이 실체를 드러낸다. 세상의 어지러움도 개인의 안위에 쓸모가 있다면 활용할 수 있다는 탐관오리의 믿음이 어지러운 세계에 더 큰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이는 코로나 유행과 함께 마주한 어떤 얼굴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코로나 유행에 대처하는 방역 당국의 노력이 빛을 발한 건 당장의 손해나 상실을 감수하고 지침을 잘 따른 이들의 헌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을 무시하고 종교행사를 강행하며 비이성적인 교리를 설파한 몇몇 종교 단체의 만행은 많은 이들의 노력을 모래성처럼 무너뜨리는 지진과도 같았다. 코로나 19 유행은 개개인의 건강을 위협하는 질병의 영역을 넘어 우리 사회 곳곳에 은둔하고 있었던 기저 심리의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거대한 그물이 됐다. 그럼에도 상황이 더욱 악화되길 바라지 않는 다수의 노력이 이어지며 끊임없이 후퇴하는 상황을 조금씩 다시 앞으로 밀어냈다. 코로나 시대의 현실에서도, <킹덤>의 허구에서도 절망과 희망은 모두 인간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전염병에 맞서 싸우고, 누군가는 포기하고, 또 다른 사람은 권력을 위해 역병에 린 생사역을 이용한다. 이러한 캐릭터에 집중한다면,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을 완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은희 작가의 말처럼 <킹덤>은 현실을 지우기보단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아포칼립스 드라마다. 집콕의 지루함을 잊게 만드는 오락적 재미를 넘어 뜻밖의 공감대를 느꼈다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단조로워진 일상의 지겨움을 압사시키는 스릴감을 선사하는 동시에 작금의 현실을 환기시키는 은유의 창이 된 셈이다.


“좋은 사람들의 집단이 판타지라고 여겨지는 현실은 슬프지만, 그래서 더욱더 좋은 사람들이 펼치는 선한 이야기가 수많은 드라마 속에 하나쯤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원호 PD의 말처럼 세상에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이야기란 기본적으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난해 3월에 방영한 신원호 PD의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바로 그런 드라마였다. 40세에 접어든 99학번 동기 의사 다섯 명의 우정을 그린 이 작품은 종합병원이라는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하는 의학드라마는 맞지만 의사라는 직업을 조명하기만 하는 드라마는 아닌 것이다.


모든 이의 삶이 동일할 수도, 균등할 수도 없겠지만 사람 사는 건 매한가지다. 밥을 먹어야 할 땐 밥을 먹고, 잠을 자야 할 땐 잠을 잔다. 살아가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해야만 하는 일이 있고, 그런 행동이 모여 세상의 흐름을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갖가지 감정을 느낀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누구나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아간다. 신원호 PD의 드라마는 바로 그런 일상을 살아가고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것이 때론 90년대의 어떤 순간을 관통하기도 하고, 교도소나 병원 같은 특수한 공간을 점유하기도 하지만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한다. 가족과 동료, 친구와 애인 사이에 나누는 대화와 감정처럼 사소한 일상에 깃든 저마다의 사연을 길어 올린다. 보편성과 특수성을 함께 아우른다.

신원호 PD의 말처럼 ‘좋은 사람들’의 ‘선한 이야기’라 할 수 있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코로나 시대의 힐링캠프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처음 겪는 팬데믹이라는 재앙 속에서 한줄기 빛처럼 떨어진 드라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천지 사태로 코로나 확진자가 급속도로 증가하며 모든 이들이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두려움을 느끼고 사람과 사람과의 거리가 그 어느 때보다 멀어지고 삭막해진 시대에서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선한 마음을 믿게 만드는 반가운 미담이었다. 다섯 명의 의대 동기들이 우연한 계기로 한 자리에 모였다가 의기투합하게 되는 과정은 누군가에게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깃발과도 같은 광경이었을지도 모른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우정과 신뢰, 배려와 지지, 사랑과 헌신과 같이 순수하고 선량한 마음으로 잉태했던 감정을 원석처럼 품고 있었던 어떤 시절을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리고 코로나 유행으로 인해 만남이 조심스러워지는 세상에서 멀어지는 건 단순히 물리적 거리만이 아님을 깨닫게 만드는 드라마이기도 했다. 만남이 희소해질수록 오갈 데 없는 감정을 짊어질 수밖에 없다. 섬처럼 고립된 감정을 끌어안고 홀로 감당하는 경험이 잦아지는 가운데 타인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고 진심 어린 격려와 위로로 용기를 북돋아주는 드라마 속 현실은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시간들을 떠올리게 만들어 반가운 것이었다. 그리고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가 ‘나도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내 목표를 이룬 것”이라는 신원호 PD의 바람은 그야말로 코로나 시대를 위한 처방전이나 다름없었다.


비현실의 판타지라 해도 마음을 건드리는 순간 진짜가 되는 법이다. <킹덤>과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코로나 시대의 우울과 상실을 잊게 만든 2020년의 주역 같은 드라마였다. 지옥과 천국처럼 대비되는 양면성의 기호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이는 코로나 이후에 찾아온 이 세계의 변화와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전염병을 막기 위해 만남을 가로막는 사이 도움이 필요한 약자들은 어느 때보다도 소외되고 있다. 그 사이 불안과 우울을 호소하며 정신 관련 상담을 받은 이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고 한다. 직장을 잃을까 봐 조바심을 느끼고, 경제적 손실을 만회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코로나 블루는 이미 심각한 사회적 현상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건강을 위협하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던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코로나 유행 이후로 지난 한 해동안 전 세계에서 사라진 일자리는 2억 5500만 개에 달한다고 한다. 그로 인해 실직자가 급증하면서 저소득층의 빈곤 문제가 보다 심각해졌다. 반대로 세계 10대 부자의 자산은 무려 595조 원이 증가했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빈곤층은 더 빈곤해졌다. 약자의 삶을 돌볼 겨를이 없는 불평등 구조가 코로나 유행으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직접 손을 잡을 수 없는 시대에서는 손을 내미는 법도 손쉽게 잊는다. 언젠가 세상은 다시 연결될 것이다. 하지만 무너진 세계는 스스로 일어날 수 없는 법이다.


“영화를 봤다면 이미 알겠지만 <기생충>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라는 공생을 이야기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2020년 1월 20일, 미국영화배우조합상(SAG)의 앙상블상을 수상한 <기생충> 배우팀 전원을 대표해 수상소감을 밝힌 배우 송강호의 말이다. <기생충>이 오스카 4관왕에 오르며 큰 지지를 받은 건 일찍이 이런 세상을 예견하고 수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덕분일 것이다. <기생충>의 대저택과 반지하방의 대비처럼 빈부 격차로 인한 양극화 현상은 점점 공고해지고 있다. 그리고 송강호가 연기한 기택의 대사처럼, ‘최고의 계획’은 무계획’이라 여기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코로나 시대는 냉혹하고 매섭다. 어쩌면 양극화 현상이야말로 코로나와 함께 치유해야할 진짜 팬데믹일지도 모른다.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격주간으로 발행하는 '1st Look' 매거진 2월 첫 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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