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세상만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용준 Jan 23. 2021

세상에 멋진 악당은 없다

영화처럼 열광할 수 없는 현실의 악에 대한 영화적인 고찰

“Why so serious?” 그러니까 “뭐가 그리 심각해?”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이 의문문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연출한 <다크 나이트>의 조커(히스 레저)가 내뱉는 대사다. 그는 악인들로 그득한 고담시를 순식간에 장악해버린 악당 중의 악당이다. 그에게는 물리적인 욕망이 없다. 돈과 명예를 얻고 싶어서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그저 혼돈 그 자체를 즐긴다. 덕분에 잃을 것도 없다. 그래서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는 데 있어서 일말의 주저함도 없다. 마치 갓난아이가 장난감을 망가뜨리듯이 순수한 악의로 세상을 흔든다.


토드 필립스 감독이 연출한 <조커>의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조커(호아킨 피닉스)다. <조커>에서의 조커는 처음부터 악인이 아니다. 광대 분장을 하고 길거리에서 광고판을 들고 싸구려 뮤직 숍을 홍보하는 평범한 남자다. 그래서 불량 청소년들의 표적이 되고, 린치를 당한다. 이유는 없다. 그저 약자이기 때문이다. 어수룩한 구석은 있어도 선량하게 살아가던 그에게 광기를 불어넣는 건 부조리한 악의로 가득한 도시다. 그러니까 <조커>는 악마가 지옥을 만드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옥에서 태어난 악마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2019년 영국의 영화전문지 <엠파이어>에서 독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역대 최고의 악당’에 관한 설문조사에서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각기 다른 영화로 조커를 연기한 배우만 넷이었고, 그중 둘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 속 조커는 열광의 대상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물음표가 떠오른다. 만약 조커가 영화가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악당이라면, 그래서 매일 같이 뉴스 사회면을 도배하는 존재라면, 과연 우리는 그를 좋아할 수 있을까? 도시를 광기로 물들이는 미치광이 사이코패스에게 열광할 수 있을까? 

다크 나이트
조커

영화 속 악당에게 열광하듯 현실의 악인에게 열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영화 속 악당과 현실의 악인은 완전히 다른 세계다. 다만 영화 속 악당은 현실의 악인을 간접 경험하게 만드는 악의 교보재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근원을 이해할 겨를조차 주지 않는 광기를 소나기처럼 쏟아붓는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결국 근본을 이해할 필요가 없는 현실의 악인을 환기시킨다. 사회적 약자로서 갖은 애환을 겪다 끝내 내면의 광기에 빠져드는 악인으로 거듭나는 <조커>의 조커는 우리 사회에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잉태되는 악의 근원을 고찰하고 논의하게 만든다.


오래된 동화 속의 악인들은 늘 하나 같이 권선징악을 위한 대상으로 존재했다. 선의 승리를 그리기 위해 태어난 대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실제 세계에서 악은 늘 패배하는 게 아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쓴 독일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악행은 끔찍한 악마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대표적인 예인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다. 그러니까 현실에서의 악인들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평범한 얼굴로 흉흉한 짓을 저지를 기회를 엿본다. 광장 벤치 아래의 폭탄 같은 존재다.


코엔 형제가 연출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는 재앙 같은 존재다. 귀를 덮은 단발머리가 우습게도 보이지만 방심하는 사이 상대의 이마에 구멍을 내는 인간이다. 총도 아니고, 산소 압축기로 말이다. 사람을 죽이는 데 일말의 주저함이 없다. 마치 동물을 사냥하듯 그렇다. 관객 입장에서 두려운 건 눈 앞까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음에도 자신의 운명을 모르는 이들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허공에 던진 동전을 잡아 가린 뒤 상대에게 묻는다. '앞'과 '뒤' 중 어디에 걸 것인가. 도대체 무엇을 걸라는 것인지 어리둥절한 상대는 몰라도 안톤 시거와 관객은 안다. 그가 지금 목숨을 건 게임에 끌려들어갔음을. 동전의 앞뒷면에 그의 목숨이 걸려있다는 것을. 바람처럼 불어오는 악의를 감지할 겨를이 없는 현실의 무력함을. 그리고 이런 무력함은 종종 현실에서도 엄습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살인의 추억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살인의 추억>의 소재가 된 악명 높은 미제사건 화성연쇄살인사건은 30여 년 만에 진범을 검거하며 비로소 ‘추억’에서 해방됐다. 덕분에 <살인의 추억>을 봤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고 진술하는 진범을 통해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악인의 실체를 알게 됐다. 그러니까 스크린 너머의 악당을 구경하는 것과 현실의 악인을 맞닥뜨리는 건 완전히 다른 감각인 것이다. 특별한 인상으로 치장한 영화 속 악당들과 달리 평범한 얼굴로 다가오는 현실의 악인들은 그래서 보다 끔찍하고 가혹하게 마음을 흔든다. 이제라도 진범을 마주했다는 안도감보다도 악의의 실체가 30여 년 동안 세상에 은둔했다는 사실이 가혹하게 더해진다.


<살인의 추억>의 엔딩 시퀀스에서 진범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목격한 소녀는 그가 ‘그냥 뻔하고 평범하게 생겼다’고 말한다. 가끔씩 우리는 험상궂게 생긴 사람을 무서운 사람으로 특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체로 진짜 끔찍한 내면은 얼굴로 드러나지 않는다. N번방 사건이 세상에 드러났을 때 많은 사람들은 대단한 악마를 상상했지만 막상 하나 같이 평범한 인상의 진범을 보고 되레 허탈해졌다. 현실의 악인은 영화 속 악당처럼 쿨하거나 멋진 존재가 아니다.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명제는 그래서 중요하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니까. 평범한 얼굴을 한 악의란 소비할 수도, 도취할 수도 없는 진짜 세계다. 배트맨도, 조커도 없다. 적어도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는. 그러니까 결국 영화는 영화다. 세상에 멋진 악당은 없다.


(한국전력공사에서 발행하는 <Kepco> 매거진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코로나 시대에 만난 두 얼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