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만났다>가 고인이 된 김용균 씨를 사회와 이어주는 방식에 대하여.
보기 전까진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를 걱정했다. ‘불쾌한 골짜기’라고 해석할 수 있는 언캐니 밸리는 로봇공학 이론에서 유래된 것으로 인간이 아닌 존재를 인간에 가까운 형상으로 구현할 때 점점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단계를 의미하는 이론을 지칭하는 언어다. 이는 본래 로봇공학에서 대두된 이론이지만 2000년대에 이르러 급격하게 발전한 CG 기술과 함께 성장한 3D 애니메이션을 평가할 때에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용어가 됐다. 특히 <폴라 익스프레스>를 비롯해 퍼포먼스 캡처 기술을 활용한 로버트 저메키스의 2000년대 작품들이 그러한 대상이었다.
기우였다. 보는 내내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 시청자 대부분 그렇다고 했다. 지난 2020년 2월 6일에 방영한 MBC <VR 휴먼 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이하, <너를 만났다>)를 본 시청자들이 온라인상에 남긴 감상은 그야말로 통곡의 바다였다. 심지어 지하철에서 보다가 눈물을 참을 수 없어서 혼났다는 이들도 있었다. <너를 만났다>는 병으로 셋째 아이를 잃은 어머니를 위해 VR 기술을 동원해 아이의 모습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구현해내는 과정과 그렇게 구현한 아이와 대면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며 심금을 울렸다.
<너를 만났다>에서 VR 기술을 동원해 재현한 아이의 형상은 온전히 진짜처럼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지만 어머니와 아이가 재회하는 모든 순간을 지켜보는 동안 그런 이물감을 의식할 겨를은 전혀 없었다. 아이를 만나기 전부터 어머니의 목소리는 이미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떨림을 느끼는 순간부터 많은 이들의 마음이 울컥했을 것이다. <너를 만났다>는 죽은 아이를 재현하는 기술적 체험에 동참하는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죽은 아이와 재회한 어머니의 심정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체감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손으로 만질 수 없는 허상의 아이를 향해 자꾸 손을 뻗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 시청자 어느 누구도 그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눈가에 차오르는 눈물을 훔치느라 손이 바빴을 거다.
지난 1월 21일과 28일에 각각 방영한 <너를 만났다> 시즌2 1화와 2화는 ‘로망스’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다. 사별한 아내와 재회하는 남편이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VR 장비를 쓰고 아내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울먹이는 남편과 이를 지켜보는 다섯 아이의 모습만으로도 역시 짙은 감정이 전해진다. <너를 만났다>는 디지털 기술을 빌린 강령술이 산 사람에게 안기는 위로를 중계하는 실험처럼 보였다. 비록 허상이라 해도 만날 수 없는 존재를 그리워하는 이들에게는 진짜 위로를 전할 수 있는 기술을 빌린 마술을 함께 참관하는 셈이랄까.
지난 2월 4일에 방영한 <너를 만났다> 시즌2 3화는 보다 공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기획으로 확대됐다. MBC 창사 60주년을 기념하는 일환으로 제작된 것으로 ‘용균이를 만났다’라는 부제만으로도 선명한 의지가 읽힌다. ‘용균이’는 지난 2018년 12월 10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근무 중 컨베이어 벨트 사이에 끼어 사망한 24세 청년 김용균 씨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용균이를 만났다’는 지금까지 <너를 만났다>가 해온 것처럼 또 한 번 디지털 강령술을 발휘해 김용균을 소환하는 VR 기술로 어떤 만남을 시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앞선 방영 분량과는 다른 기류가 감지됐다. <너를 만났다>에서 사별한 이를 만나는 대상은 엄마나 남편, 즉 가족이었다. 그런데 ‘용균이를 만났다’ 편에서 다시 재현한 김용균 씨를 만나는 이는 그를 모르는 제삼자들이었다. 어머니나 가족들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용균이를 만났다’ 편은 어느 개인의 절절함을 함께 공감하는 수준을 넘어 공적으로 보다 널리 알 필요가 있는 문제의 실체에 접근하고 체험하게 만드는, 기술이 어떻게 사회적 문제를 공감하게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는 방식으로 진화한 결과였다. 단순히 억울하게 죽은 아들을 만나는 어머니의 모습을 연출하며 눈물샘을 자극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용균이를 보았다’ 편은 고인이 된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씨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길에서 전단지를 돌리며 노동법 개정애 관심을 가져주길 권하는 김미숙 씨의 모습이 등장한다. 전단지를 받길 거부하는 손사례 사이에서도 “안전한 사회를 위해서 청원 운동하고 있습니다. 함께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김미숙 씨의 모습이 꿋꿋해서 더욱 간절해 보인다. 그리고 김미숙 씨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부모가 조금 더 잘났으면 애한테는 그런 안 좋은 회사를 들어가지 않게 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그런 자책하고 또 원망 이런 게 있으니까 우는 모습이 싫어요. 뭘 잘했다고 우리가 울 자격이나 있나.” 잠시 말을 멈춘 김미숙 씨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오른다.
김미숙 씨의 바람처럼 ‘용균이를 보았다’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눈물을 포착하는 대신 다른 길을 지향한다. 아들의 죽음 뒤로 남겨진 어머니의 삶을 따라간다. 어머니에서 투사가 된, 더 이상 김용균아 아닌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가 된 김미숙 씨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들을 위로하고 동시에 그들이 더 이상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아들을 잃은 이후로 더 이상 어머니일 수 없게 된 김미숙 씨는 국회의사당 앞에 텐트를 치고 단식을 이어가며 노동법 개정을 촉구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김용균을 만난 건 어머니가 아니었다.
임상 변리사, 주부, 교수, 학생, 디자이너, 취업준비생, 연구원, 대학 강사, 배우 등 20대에서 50대까지 김용균과 무관한 이들이 김용균을 만나기 위해 모였다. 김용균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어느 정도 아는 이도 있었고, 단편적으로만 아는 이도 있었고, 아예 모르는 이도 있었다. 그들이 모두 김용균을 만나기 위해 VR 장비를 착용하고 그린 매트로 덮인 세트에 들어섰다. 그들의 양 앞으로 석탄을 실어 나르는 컨베이어 벨트가 빠르게 돌아간다. 그리고 그 컨베이어 벨트의 작동이 멈추지 않도록 그 아래로 머리를 들이밀고 삽으로 이물질을 긁어내는 김용균의 모습도 함께 보인다. VR 장비를 쓰고 그 현장을 직접 보는 이들의 긴장감은 상당해보인다. 심지어 TV를 통해 보는 입장에서도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
VR 체험을 마치고 난 참가자들은 해당 문제에 대한 관심이 너무 적었다는 사실에 대해 반성하기도 하고, 열악한 노동 환경을 목도한 충격을 소회 하기도 했다. 한 참가자는 김용균이 친구라면 무슨 얘기를 해주고 싶냐는 질문에 “그냥 그만두라고 하고 싶었어요”라고 답하기도 했다. 누가 봐도 사람이 죽었다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환경인 것이다. 그러니까 살기 위해서 일을 하려고 했던 사람이 죽고 있다. 한두 명이 아니다. ‘2019년 한 해 동안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자는 2020명, 하루 평균 5.53명이 죽어가고 있다.’ 김용균의 마지막 모습을 본 참가자들의 눈 앞에 떠오른 자막은 허구가 아니다.
지난 9일 포스코에서는 30대 협력업체 노동자가 기계 사이에 끼여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지난 넉 달 사이 여섯 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모두가 다 평범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자식, 누군가의 부모, 누군가의 형제, 누군가의 가족이었을 것이다. 김용균도 그랬다. 노래방에서 노래하는 걸 좋아하는 청년이었고, 가족의 안녕을 빌며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었다. 그 미래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2021년 1월 8일 중대재해기업 처벌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뒤 국회의사당 앞에서 단식 투쟁을 벌이던 김미숙 씨는 기자들 앞에 서서 눈물을 흘렸다. 여전히 부족하고 기대에 못 미치는 법안이지만 사람의 목숨을 통해 비로소 얻어낸 이 법안이 보다 많은 이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길 희망한다. 거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길, 더 많은 이들이 용균이를 만날 수 있길, 알아주길 바란다.
('예스24'에서 운영하는 패션 웹진 <스냅>에 연재하는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