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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an 11. 2021

노브라論

그 무엇도 위협하지 않지만 부정적인 시선과 싸워야 하는 노브라에 관해.

결코 보여선 안될 것이 보인다는 듯이, 결코 벗어선 안될 것을 벗었다는 듯이, 노브라를 향한 부정적인 시선들. 하지만 노브라는 그 무엇도 위협하지 않았다. 그저 드러낼 뿐이다. 가슴도, 편견도.


2019년 6월 21일에 방영을 시작한 <악플의 밤>은 유명인들이 출연해 악플을 읽는 예능프로그램이다. 진행자로 출연한 설리도 악플을 읽었다. ‘기승전 노브라 그냥 설꼭지.’ 설리는 SNS를 통해 종종 유두가 돌출한 노브라 차림의 모습을 여러 차례 포스팅했다. 그리고 이를 불편하다고 피력하는 이들에게 늘 자신의 자유를 주장해왔다. <악플의 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브래지어의 착용 여부에 대해선 ‘개인의 자유’라고, ‘브래지어는 그냥 액세서리니까 어울리는 옷에 잘 맞춰 입으면 되는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브래지어를 착용하면) 소화에도 좋지 않다’고 말할 때에는 함께 자리한 김숙이 강한 공감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실 어느 정도 예감은 됐다. 자신에 관한 악플을 읽는 프로그램에 설리가 출연한다니, 전쟁터로 폭탄을 던지는 셈이었다. 관건은 폭발의 수위였다. <악플의 밤>은 그리고 설리는 제대로 터졌다. 방송 직후 실시간 검색어에 ‘설리’와 ‘노브라’가 상위권을 차지했다. 이에 대한 의견들이 다양한 채널을 통해 쏟아졌다. 보기 불편하다는 의견과 개인의 자유라는 의견이 대립했지만 확실한 건 대부분의 여성들이 브래지어 착용의 불편함을 적극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악플의 밤>과 설리는 일부 여성의 일탈적인 행위처럼 여겨지던 노브라라는 이슈를 현실적인 쟁점으로 끌어올렸다. 노브라가 단지 설리의 이상한 관심 끌기가 아니라 수많은 여성들의 고민이자 의견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포털사이트에서 ‘노브라’를 검색하면 ‘청소년에게 노출하기 부적합한 검색 결과를 포함하고 있습니다’라는 경고 문구 아래 이러한 의견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 그중에서는 ‘오늘 노브라로 마트 다녀왔는데 세상 홀가분하네요’라는 경험담도 눈에 띈다. 동시에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게 되는 불편함이 함께 나열된다. 이에 공감하는 댓글들도 적지 않다. 브래지어만 벗어도 호흡도, 소화도 편하고, 더위도 가시고, 여러모로 건강에 이롭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다고, 하지만 노브라를 선택했을 때 감당해야 할 시선들에 대한 부담감이 만만치 않다고, 서로에게 공감하고 있었다. 심지어 우연한 신체 접촉으로 가장해 가슴에 부딪히는 어떤 아저씨들에 대한 불쾌함을 토로하고 이에 격하게 공감하는 댓글도 볼 수 있었다.


남자로서 브래지어를 착용해본 적 없는 입장에서 그 불편함을 직접적으로 겪어본 적은 없으니 완전히 공감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좀 의아할 것 같다. 그렇게 믿는 것인지, 믿고 싶은 것인지 의심스러울 것 같다. 무더운 한여름에는 얇은 티셔츠를 한 장 겹쳐 입기만 해도 덥다. 물론 자신은 그렇게 입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고, 실제로 그러할지 몰라도 최소한 나는 그렇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하나. 무더운 티셔츠 한 장을 입느냐, 두 장을 입느냐는 개인의 자유다. 그렇다면 티셔츠 안에 브래지어를 입느냐, 입지 않느냐는 어떨까? 그것 역시 개인의 자유일 수 없을까?


최근 SNS에서 종종 보게 된 광고 영상 중 흥미를 끄는 것이 있었다. 상의를 입지 않은 남자가 자신의 뱃살을 보며 한탄하다 티셔츠를 하나 입는다. 그러자 갑자기 뱃살이 쑥 들어간다. 남성용 몸매 보정 속옷 광고였다.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남성 몸매 보정’이라는 검색어를 넣고 엔터키만 눌러도 상당히 많은 관련 제품이 등장했다. 심지어 어깨 부위에 패드를 삽입해 어깨를 넓게 보이도록 만들어주는 제품도 있었다. 이 제품들이 실제로 얼마나 팔리는지, 정말 효과적으로 몸매를 보정해주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런 류의 제품들이 팔리고 있다는 건 그만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동시대 남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을 부른다. 이는 탈코르셋을 주장하는 여성들의 시대 한편에서 착코르셋을 권유하는 남성의 시대가 열리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남성용 보정 의류를 광고하는 영상의 댓글 중에서는 이런 제품을 구매하는 남자들을 비하하는 듯한 문장도 더러 발견할 수 있다. 운동해서 살을 뺄 생각은 하지 않고 남을 속이려고만 든다는 식인데,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이것이 여성들의 노브라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의견들과 유사한 혐오를 품고 있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의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악플의 밤>에서 설리가 읽은 악플에서 등장한 ‘설꼭지’는 설리가 노브라 차림으로 돌출된 젖꼭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드러낸다는 것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에 가깝다. 그러니까 젖꼭지를 감추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 불쾌하고, 이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니 조롱해도 상관없다는 것인데, 어딘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여자는 브래지어를 해야만 한다는 조항이 법전에 명문화되지 않은 이상, 노브라는 불법이 아니다. 노브라가 공연음란죄에 해당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노브라 자체는 음란한 행위로 분류되지 않는다. 역설적이지만 노브라를 음란하다고 여기는 생각이 음란할 가능성은 있을지 모르겠다. 마치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니까 성폭행을 당하는 것이라는 식의 구시대적 사고가 연상된다. 시대착오적이다. 그러나 지구는 돌고, 시간은 흐르고, 생각은 변한다. 변해야 한다. 브래지어는 19세기까지 여성들에게 의무화된 복식이 아니었지만 20세기 초 코르셋의 대안으로 주목을 받게 됐고, 점차 각광받는 복식이 됐다. 그러니까 여성들이 답답한 코르셋을 벗는데 공헌한 것이 브래지어였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브라는 탈코르셋 이후에 또 한 번 찾아온 여성 복식의 변혁일지도 모른다.


다만 노브라를 오늘날 페미니즘 진영이 구호화한 탈코르셋 운동과 동일한 방향성에 두고 볼 일만은 아닌 것 같다. 탈코르셋이 여성의 인권 신장을 위한 자주적 구호에 가깝다면 노브라는 일상의 편의를 위한 자발적 선택에 가깝기 때문이다. 다만 노브라가 탈코르셋의 연장선상에 놓인 운동처럼 보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그것이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그렇다고 규정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무언가가 싫다고 말하는 건 자유다. 모두의 취향이 동일할 이유는 없으므로. 하지만 자신이 싫다는 이유로 남들이 할 수 없게 만드는 건 자유가 아니다. 노브라가 싫다는 것과 노브라를 하지 말라고 말하는 건 완전히 다른 우주다. 지극히 파시즘적인 폭력이다. 고로 해선 안된다. 남의 노브라와 젖꼭지가 싫을 순 있겠지만 관여할 순 없다. 그게 민주주의 사회의 룰이니까. 만인에게 보장된 합법적 자유이므로.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주인공 영혜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외출을 한다는 것 때문에 남편과 갈등을 겪는다. 그럼에도 영혜는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말한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그렇다. 가슴은, 젖꼭지는, 노브라는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 노브라보다도 노브라를 지적하는 손과 세치 혀가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노브라라는 자유를 인정할 줄 모르는 폭력적 시선들. 결국 노브라로 인해 드러난 건 여성의 가슴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왜곡된 성인지감수성 아닐까? 불온함을 지적하는 그 손가락 끝에 걸린 불온함이 더 무섭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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