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그린 90년대에 관하여.
‘1990년대 있었던 실제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도입부에 등장하는 자막처럼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1991년에 벌어진 실제 사건이 모티브가 된 영화다. 소위 ‘낙동강 페놀 오염사건’으로 불리는, 한 대기업 공장에서 30톤 이상의 페놀 원액을 낙동강에 무단 방류해 식수원을 심각하게 오염시키며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일으킨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심각한 사회문제를 유발한 실제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마냥 심각하게 인상을 쓰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확실한 기조는, 내부 고발이라는 주제는 무거울 수 있지만 이 친구들이 신나게 활약하는 이야기였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연출한 이종필 감독의 말처럼 이 작품은 세 여성 캐릭터들의 활약상을 명랑만화처럼 쾌활하게 그려나가는데 집중한다. 마치 콜라주 하듯 재현된 90년대의 갖은 풍경을 병풍 삼아 평범한 세 여성이 대기업에서 은폐하려는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끝내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통쾌하고 맹렬한 카타르시스로 끌어올린다.
1995년, 삼진그룹의 직원 이자영(고아성), 정유나(이솜), 심보람(박혜수)은 상고 출신이라는 이유로 입사 8년 차임에도 사무실 청소와 커피 심부름을 비롯한 잡무를 도맡는 말단 사원 신세를 면치 못한다.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영어 토익반이다. ‘글로벌 이노베이션’을 주창하는 삼진전자에서 ‘차별 철폐’와 ‘능력중심’이라는 슬로건 아래 근무연수 1년 차 이상인 고졸 사원을 대상으로 토익시험 600점 이상을 맞으면 대리로 진급시켜주겠다는 공고를 내걸고 영어 토익반을 개설했기 때문이다. 대리가 되면 사무실 청소나 커피 심부름 따위와는 이별이다. 그토록 고대하던 진짜 커리어우먼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아침 일찍 회사에 나가 영어토익반에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됐지만 90년대 이전까지는 해외여행을 계획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았다. 88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이후 1989년부터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시행되면서 본격적인 해외여행이 가능해졌다. 그전까진 유학이나 비즈니스 목적의 출장 목적으로 출국하는 것이 아니라면 국경을 넘기가 쉽지 않았다. 신혼여행을 해외로 떠나는 것도 90년대부터 시작된 문화였다. 세계를 향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활짝 열린 시절이었다. 그만큼 영어 교육에 대한 열기도 뜨거워졌다. 세계화가 사회적 변화를 주도하는 단어로 떠오르면서 영어 실력이 입신양명의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란 예감이 팽배해진 90년대 초부터 조기 영어 교육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어린 자녀의 조기 해외 유학을 추진하는 가정도 급증했다. 심지어 선진국이 되기 위해선 영어를 제2공용어로 써야 한다는 주장까지 득세하며 이에 대한 찬반을 주제로 한 TV토론이 열릴 정도였다.
이는 정부의 정책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1993년에 출범한 문민정부에서는 세계화 정책을 추진하며 시장을 개방하고 경쟁을 통해 세계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것도 그런 일환이었다. 굴지의 대기업들이 세계화를 선언하며 해외 각지에 공장을 짓고 글로벌 전략을 세운 것 역시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다. 1인당 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서고, 연간 1천억 달러 이상의 수출액을 기록한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사회 전반에 풍요의 기운이 그득했다.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부자아빠의 희망이 가득한 가운데 나만의 개성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X세대의 출현과 함께 소비시장도 재편되는 분위기였다.
이렇듯 국가경쟁력과 경제 수준을 높아지는 가운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움직임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1년에 벌어진 낙동강 페놀 오염사건 당시 대구시민을 비롯한 환경단체들의 거센 불매운동은 이러한 움직임의 시작점이나 다름없었다.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겠다는 정부와 기업들의 선언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그에 준하는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성숙과 맞물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페놀 유출 사실을 은폐하려는 대기업의 음모에 맞선 세 여성의 활약상을 그리며 과도기적인 성장통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의 90년대를 유쾌하게 관통해나간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인스턴트커피와 공중전화처럼, 지극히 90년대스러운 노스탤지어를 품은 영화이기도 하다. 당시만 해도 에스프레소나 아메리카노 혹은 라테가 아닌 인스턴트커피의 시간이었다. 커피전문점보다는 자판기 커피가 익숙한 시절이었다. 영화의 극 초반에 묘사된 것처럼 뜨거운 물을 부은 인스턴트커피에 설탕과 프림을 몇 스푼 더 넣느냐가 커피 취향을 가늠하는 기준이었다. 그러니까 90년대란 아메리카노와 라테가 아닌, 블랙커피와 밀크커피로 커피 취향을 구분하는 시대였던 것이다.
반대로 통신 시장의 변화가 급변했던 90년대에 처음으로 탄생한 너와 나의 연결고리는 바로 무선호출기, 즉 삐삐였다. 전화를 걸거나 직접적인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는 없어도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대에게 긴급하게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첫 번째 신문물이었다. 덕분에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도 그러하듯이, 공중전화기 앞에 늘어선 줄은 90년대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그러다 90년대 후반부터 점차 핸드폰 보급이 보편화되면서 삐삐는 시대의 뒤안길로 밀려갔지만 90년대를 지나온 이들에게 삐삐란 90년대의 추억을 담고 있는 타임캡슐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불과 30여 년 만에 세상은 크게 달라졌다. 당연한 것들이 사라지고, 생소한 것들이 당연해진다. 손에 잡히는 무언가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 사고도, 철학도 달라졌다. 인스턴트커피 대신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삐삐 대신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듯이, 아무렇지 않게 던지던 말이 무례한 짓임을 깨닫는 세상이 되고, 당연하다고 여긴 것이 차별이라는 것을 교육하는 시대가 됐다. 여전히 세상이 엉망진창인 것 같아도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분명 나은 세계다. 그러니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과거를 그리지만 결국 미래를 가리키는 영화다. 더 나은 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용기를 준다. 씩씩하고, 쾌활하게, 내미는 손 같은 영화다.
(계간 발행하는 대한항공 기내매거진 'MORNING CALM' 3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