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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Mar 16. 2021

'고등래퍼4' 어리다고 얕보지 말아요

그 시절에만 가능한 건강한 스웨그, '고등래퍼 4'에 관하여.

‘클라쓰’가 달라졌다. 지난 2월 19일에 시작한 <고등래퍼 4>에 참가한 고등학생 경연자들의 랩을 들어보면 2017년에 처음 방영한 <고등래퍼>와는 수준이 다른 프로그램이 됐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진다. 엠넷의 대표적인 힙합 서바이벌 경연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의 10대 버전이라 할 수 있는 <고등래퍼>가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치기 어리다’는 느낌이 강했다. 시즌1은 래퍼가 되고 싶어 하는 어린 고등학생들이 가능성을 뽐내는 ‘마이너리그’라는 인식이 강했다.


실제로 <고등래퍼> 시즌1 참가했던 어린 래퍼 몇몇은 <쇼미더머니>에서도 호기롭게 등장했지만 대체로 좋은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일찍이 <쇼미더머니>에 연이어 참가하며 이름을 알린 양홍원이 <고등래퍼>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쇼미더머니 8>에서 준우승까지 차지하며 실력을 인정받은 것을 제외하면 시즌1 참가자 중에서 크게 두각을 드러낸다고 언급할만한 래퍼는 드물다. 하지만 <고등래퍼 2>의 우승자 김하온과 이병재, 이로한, <고등래퍼 3>의 우승자 이영지와 오동환(언텔) 등 이후 시즌부터 준수한 실력을 드러내며 프로그램 출연 이후로 실력을 인정받고 큰 인기를 얻으며 래퍼로서 활동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덕분에 <고등래퍼 4>는 이 프로그램이 더 이상 <쇼미더머니>의 마이너리그 같은 것이 아님을 선언하는 자리처럼 보인다. 이미 지난 두 번의 시즌을 통해 이름을 알리는 것을 넘어 래퍼로서 성공적인 활동을 펼쳐나가는 래퍼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이미 <쇼미더머니>에 먼저 참가해 실력을 인정받은 디아크(김우림), 전현준(베이니플), 최은서 같은 어린 래퍼들이 <쇼미더머니>의 후광을 입고 <고등래퍼 4>에 등장하는 것도 이 프로그램의 입지가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동시에 그런 ‘네임드’ 고등래퍼들과 맞붙어도 실력이 떨어져 보이지 않는, 오히려 더욱 신선하고 세련돼 보이는 고등래퍼들이 대거 등장하며 상향평준화된 수준을 보여준다는 점이 <고등래퍼 4>에서 느껴지는 가장 큰 놀라움이다. 더 콰이엇, 염따, 박재범, PH-1, 우기, 사이먼 도미닉, 로꼬, 창모, 웨이체드까지, 지금 힙합 신에서 내로라하는 뮤지션들이 프로듀서로 등장하며 고등래퍼들의 무대에 감탄하고 그들 스스로가 진짜 열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만드는 건 결코 과장이 아니다. ‘국힙의 미래가 밝다’는 더 콰이엇의 말도 하기 위해서 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저마다 비슷한 교복을 입고 앉아있을 때에는 영락없는 고등학생이지만 무대에 올라 비트에 랩을 하는 순간부터 저마다 개성이 뚜렷한 래퍼로서의 정체성을 마음껏 발산한다. 예상보다 뛰어난 자질을 가진 래퍼들이 즐비하고, 몇몇 무대에서는 프로 못지않은 실력이 느껴져서 흥미롭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비단 노인을 위한 헌사가 아니다.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할 뿐 과거에 그 나이대에서는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성장에 도달한 재능이 즐비하다. 시대가 달라졌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진다.


이제는 어리다는 것이 재능을 제한하는 기준이 되는 시대가 아니다. 숫자가 가능성의 기준점이 되지 않는다. 성인이 돼야만 프로로서의 자격을 가질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사회에 나와 전공과 무관한 일을 한다 해도 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 물론 꿈이 있다면 당장 학교를 뛰쳐나와도 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미래의 정답을 학교에서만 찾지 않아도 된다는  아는 아이들은 이미 알아서 자신에게 학교가 되는 무대를 찾아가는 시대라는 것이다. <고등래퍼 4>는 바로 그런 시대의 징후를 극명하게 대변하는 프로그램 같다.


한편 <고등래퍼 4>는 방영 초반부터 성폭행으로 처벌받은 전력이 밝혀지며 하차하게 된 참가자로 인해 불미스러운 주목을 받았다. 해당 참가자의 녹화된 출연 분량은 최대한 편집된 것으로 보이지만 흐름상 불가피하게 편집할 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면에서는 블러 처리된 모습으로 그 불미스러운 여운을 3화까진 남겨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해당 사건을 다룬 기사가 게재된 SNS 댓글 창에서는 10대가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였다는 것 자체가 너무 놀라웠다는 반응이 종종 발견되기도 하는데 어쩌면 이는 <고등래퍼 4>가 의도치 않게 우리 사회에 던지는 모종의 물음표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10대란 어른들이 원하지 않는 꿈을 꿀 수도 있는 나이지만 어른들 못지않게 나쁜 짓을 벌일 수도 있는 나이라는 것. 10대란 분명 어린 나이지만 마냥 어리다고 무시해서도, 방심해서도 안 되는 시절이라는 것을 <고등래퍼 4>가 여러 면에서 증명하고 있는 셈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고등래퍼>는 힙합이라는 음악 장르를 통해 지금 10대를 보다 관심 있게 바라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일종의 리얼리티 쇼라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고등래퍼>는 힙합 서바이벌을 표방하는 래퍼 경연 프로그램이다. 힙합이나 랩뮤직에 최소한의 흥미만 있다면 <고등래퍼 4>는 보고, 듣는 재미가 상당한 프로그램이다. 어리지만 얕볼 수 없는 10대 경연자들의 실력이 그만큼 출중한 덕분이다. 그리고 그 나이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패기나 열정이라는 단어가 너무 단순하게 느껴지는 그 시절의 에너지가 전해진다. 그때에만 가능했던 스웨그가 거기 있다. 보기 좋다.


('예스24'에서 운영하는 패션 웹진 <스냅>에 연재하는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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