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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Mar 05. 2021

'펜트하우스2' 어쩌면 진정한 'K' 드라마

'펜트하우스2'는 차별과 혐오를 즐기는 엔터테인먼트 그 자체다.

‘정말 이걸 이렇게 한다고?’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펜트하우스2> 1화의 도입부를 보면서 말이다. 지난 시즌의 마지막으로부터 1년이 지난 후, 청아예술고등학교에서는 청아예술제가 열린다. 열띤 경연이 끝나고 대상의 주인공을 발표하는 순간 밖에서 날아든 갑작스러운 비명소리에 놀란 이들이 모두 뛰쳐나가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한다. 누군가 계단에 굴러 떨어져 흥건한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던 것. 그리고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갑자기 4개월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뉴욕에서 공연을 펼치는 천서진(김소연)의 모습으로 다시 시작된 드라마는 천서진이 전남편 하윤철(윤종훈)과 우연히 재회해 호텔방에서 뜨거운 밤을 보냈다는 정황을 추측하게 만들고, 천서진이 떠난 호텔방에 혼자 남아있던 하윤철을 괴한들이 납치해 무작위로 구타하고 바다로 던져버리는 장면을 이어간다. 이 모든 장면이 불과 10여분 남짓한 시간 동안 드라마에서 연출된 것인데 그야말로 일말의 잡념도 끼어들 틈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연이어지는 사건을 무자비하게 나열하는 서사를 예측하기란 도무지 불가능하다.


그렇다. 이것이 <펜트하우스>이며 역시 <펜트하우스2>다. <펜트하우스>가 얼마나 좋은 드라마인가를 논하는 건 그래서 무력한 일이다. 지난 시즌의 인기에 힘입어 발 빠르게 제작된 후속 시즌은 1화부터 20%대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최고 시청률은 무려 27%에 다다르며 근래 보기 드문 흥행성을 자랑하는, 그야말로 괴물 같은 작품이 됐다. 소위 말하는 막장드라마라는 비판도 대단한 인기 앞에서는 무력한 일처럼 느껴진다. 실질적으로 딱히 생산성 없는 비판이기도 하다. <펜트하우스>는 실패해서 막장드라마가 된 작품이 아니다. 작정하고 날을 세운 막장드라마이기 때문이다.

<펜트하우스>에서 그러했듯이 <펜트하우스2>는 불륜과 살인을 묘사하고 연출하는데 머뭇거리는 일이 없다. 대한민국 1%가 모여산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구성원이 거기서 거기인 것이 늘 의아하긴 하나 어쨌든 <펜트하우스2>는 지난 시즌과 마찬가지로 욕망으로 드글거리는 펜트하우스를 무대로 펼쳐지는 패악질을 남녀노소 구별 없이 다채롭게 펼쳐 보인다. 무례하고 염치없는 어른들은 <펜트하우스2>에서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짓을 반복한다. 웃는 얼굴로 마주하다가도 상대의 상처를 발견하면 여지없이 헤집는다. 아이들도 다를 게 없다. 혐오로 연대하다가도 혐오로 갈라진다.


이런 드라마를 도대체 왜 보냐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건 정말 굉장한 볼거리일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이 싸움구경인데 <펜트하우스2>는 있는 이들의 집안싸움을 지난 시즌보다도 더 가열차게 전시한다. 상대적으로 선악의 구별이 명확해 보였던 지난 시즌의 초반 분위기와 달리 시작부터 개싸움이 따로 없다. 같은 편인 줄 알았던 이웃이 언제 날 물어뜯을지 모르는 상황이 연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섬세한 인과나 촘촘한 논리의 필요성은 일찌감치 불필요해졌다.


<펜트하우스2>는 그 이후의 상황을 보는 재미에 중독된 이들이 찾는 마약과도 같다. 이 드라마가 얼마나 말이 되는가 여부를 묻거나 따지는 건 큰 의미가 없다. 덕분에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목격할 때에는 이상한 쾌감이 생길 정도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광경이 또 한 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광경으로 이어질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펜트하우스2>는 결코 예상 불가능한 상황을 그려서 대단한 드라마가 아니다. 어느 드라마도 쉽게 넘지 못했던 선을 일거에 넘고 또 넘어버리다 못해 그런 과정 자체를 익숙하게 만든 작품을 구경하는 재미란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것이다.

<펜트하우스2>가 증명한 건 많은 이들이 일정한 자극을 넘어서는 자극, 즉 역치를 넘어서는 자극을 즐기길 꺼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막장드라마를 욕하면서도 보는 건 실제로 그런 작품들이 주는 자극에 얻어맞는 쾌감을 즐기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체로 그런 류의 드라마들이 보여주는 서사의 공식이란 불륜이나 치정과 같이 윤리적으로 손가락질당하기 좋은 사건을 나열하고 희생자로 지목당한 누군가가 끝없이 모욕당하는 순간을 전시하다 말미에 다다라 시원한 인과응보의 쾌감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쾌감은 상상 이상으로 막강해야 한다. 이를테면 ‘김치 싸대기’만 한 파괴력을 가질수록 보는 이들의 보상심리를 충족할 가능성도 커진다는 것이다.


<펜트하우스2>의 시청자들이 해당 작품이 그리는 폭력성의 수위를 얼마나 만끽하고 있는지 몰라도 그것을 마냥 즐겁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펜트하우스>를 소비하는 시청자들 역시 드라마만큼이나 이중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면 지나친 기우일까. 폭력적인 묘사와 혐오적인 발언의 수위가 세질수록 이를 응징하고 규탄하는 인과응보 서사에 대한 기대심리도 함께 커지고, 드라마의 시청률도 상승한다. 혐오와 정의가 한 바닥에서 뒹구는데 의미가 다른 두 단어를 즐기는 심리는 동일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진짜 현실의 기저에 놓인 욕망이 <펜트하우스>와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란 모종의 공감대가 이 막장드라마의 위력을 기꺼이 떠받들게 만든다.


<펜트하우스>는 그런 이중성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드라마처럼 보인다. 얼마나 정교하게 던지고, 정확하게 받아치는가 보다도 얼마나 세게 던지고, 세게 휘두르는가에 탐닉하는 이들을 겁박하듯 몰아붙이는 작품이다. 학교폭력을 그릴 때에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가혹하게 다루면 된다.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다. 무엇이든 세게 때린 다름에, 세게 돌려주면 먹힌다는 것을 너무 잘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서사의 개연성 같은 건 아마추어나 생각하는 것이라고 일갈하듯 깜짝쇼처럼 인과를 이어나가며 자극적인 수위를 한층 더 높여가는 드라마와 이에 몰입하는 시청자들의 궁합은 실로 절묘하면서도 당연한 것이다. 차별과 혐오의 세계를 경멸하고 모욕하는 재미가 만만찮다. 그야말로 진정한 ‘K’드라마랄까.


('예스24'에서 운영하는 패션 웹진 <스냅>에 연재하는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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