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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Mar 25. 2021

'빈센조' 정의는 이길 때 팔린다

정의라는 고구마 대신 복수라는 사이다를 파는, '빈센조'에 대하여

‘정의는 늘 승리한다’는 구호는 판타지 장르에 가깝다. 현실에서 정의란 대체로 지는 쪽이다.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기가 어렵다. 그래서 정의라는 단어 앞에 쌓인 회의감이 정의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한둘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정의가 승리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현실에서 좀처럼 승리하지 못하는 정의가 승리하는 허구를 소비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절망보단 희망을 품는 쪽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는 늘 승리하지 못해도 대체로 잘 팔리는 이야기감이 된다. <빈센조>도 그런 이야기다.

마피아 보스의 법률 고문 즉 변호사를 의미하는 이탈리아 단어 ‘콘실리에리(Consigliere)’가 좀 더 대중적으로 알려진 건 마피아 영화 덕분이었다. 특히 <대부>에서 조직의 보스인 돈 코를리오네의 심복인 톰은 양아들이자 고문 변호사로서 일종의 브레인 역할을 하는 콘실리에리다. 전통적으로 ‘패밀리’를 중시하는 마피아는 혈통에 따른 조직 서열을 중시하지만 콘실리에리는 유일한 비혈통 관계 참모이자 명예직에 가까운 직책이라고 한다. 그리고 <빈센조>는 ‘이탈리아 마피아 보스의 고문 변호사’ 빈센조 까사노(송중기)가 바로 그런 콘실리에리라고 정의하며 시작하는 드라마다.


<빈센조>는 1화 도입부부터 이탈리아 마피아 세계에서 콘실리에리로 살아온 빈센조의 신출귀몰한 능력을 거창하게 전시한다. 여기서 ‘거창하게’라는 수사는 비아냥이 아니다. 드라마 자체가 그의 능력을 시청자 앞에 작정하고 거창하게 전시하는 의도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유가 있다. 이탈리아 마피아 세계 속에서도 ‘천상천하 유아독존’ 같은 ‘넘사벽’ 존재임을 전시하는 1화 도입부는 그 이후로 진행될 코미디와 드라마를 위한 블록버스터급 밑밥에 가깝다. 그 누구도 그를 압도할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초장부터 확실하게, 시청자 품에 안겨주는 셈이다.


그러니까 빈센조는 그야말로 완벽한 존재다. 그리고 그 완벽한 존재가 이탈리아에서 한국으로 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에게는 가 계획이 있다. 잔혹한 마피아의 세계를 떠나 평범하면서도 안락한 여생을 살아가고자 한다. 그전에 해결할 일이 있다. 서울의 허름한 빌딩 금가플라자 지하에 은닉한 금괴 15톤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문제는 해당 건물이 재개발로 인한 세입자들과 건물주 사이에 갈등 국면에 있다는 것.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지하에 있는 금괴를 찾아 떠나려는 계획도 늦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머리를 쓰는 한국 사람답게 빈센조는 새로운 계획을 세우지만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연이어 찾아온다. 하지만 빈센조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빈센조는 슈퍼히어로형 캐릭터에 가깝다. 초능력은 없지만 초능력에 가까운 지략과 무력 그리고 권력으로 상대를 압도한다. 그는 강자다. 동시에 선한 목자도, 착한 사마리아인도 아니다. 그는 마피아다. 악당이다. 그런 악당이 악당을 상대한다. 그러니까 <빈센조>는 선악의 대결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악인전’ 같은 드라마다. 더 센 악인이 덜 센 악인을 잡는 이야기다. 명분은 있다. 마피아도 하지 않을 악랄한 짓을 벌이는 재벌과 법조인의 정경유착 카르텔이 꼴사납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의구현 판타지보다도 설득력 있는 판타지인 셈이다.


빈센조뿐만 아니라 빈센조와 함께 연대하는 홍차영(전여빈) 역시 정의를 신봉하는 변호사가 아니다. 본래 거대 로펌에서 기득권의 이익을 보전해주던 그가 돌아선 건 양심 있는 인권변호사로 일하던 아버지 홍유찬(유재명)에게 벌어진 비극으로 인해 열린 뚜껑을 닫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빈센조>의 인과응보는 결과적으로 정의구현으로 수렴하는 판타지일 뿐이다. <빈센조>에서 시청자들이 응원하는 대상은 정의구현을 전제로 활약하지 않는다. 그저 사적인 이익 혹은 복수를 위해 움직일 뿐이다. 그렇게 응징하게 되는 대상이 추악한 민낯을 가린 사회지도층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빈센조>는 정의에 무겁게 짓눌릴 필요 없이 소비하기 좋은, 지극히 오락적인 인과응보 드라마인 셈이다.

현실에서 정의가 승리하지 못해도 드라마의 정의가 이왕 승리할 것이라면 그 승리가 꼭 현실적일 필요도 없다는 것을, <빈센조>는 잘 아는 드라마 같다. 때때로 지나치게 허무맹랑하고 과하게 유치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런 허무맹랑함과 유치함을 대체로 뻔뻔하게 돌파해 나가는 방식은 그 자체로 즐길 만한 것이 된다. 좀처럼 쓸모없어 보이고 대놓고 낭비적임에도 불구하고 잔망스럽게 늘어놓은 캐릭터들을 하나하나 애써 건드리는 방식 역시 극이 진행될수록 예사롭지 않은 매력을 더해주는 것 같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지만 주성치 영화스러운 슬랩스틱이 꾸준히 등장하는 것도 역시 예사롭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빈센조>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척하지만 팔릴 만한 웃음과 쾌감을 이미 잘 아는, 지극히 현실적인 판타지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허구에서 팔리는 정의란 이런 것이다. 선이 악을 이긴다는 순진한 환상을 권하는 대신, 더 센 악을 정의에 가깝게 세워 두고, 덜 센 악을 응징함으로써. 고구마처럼 꾸역꾸역 먹이는 것 같다가도 통쾌한 사이다를 들이키듯.


('예스24'에서 운영하는 패션 웹진 <스냅>에 연재하는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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