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윤!(Yuh-Jung Youn!)’ 브래드 피트의 입으로 호명된 이름으로 인해 2021년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지난 한 주 동안 한국땅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가 됐다. 오스카 최초로 배우 부문 한국인 수상자가 된 배우 윤여정이 여우조연상 수상자로 연단에 올라 수상소감을 말하는 순간은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오스카 4관왕을 차지하는 순간들을 목도했음에도 초현실적이었다. 비록 ‘글로벌이 아닌 로컬’이라 해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 시상식인 오스카 무대에서 2년 연속으로 한국인 수상자가 호명되는 광경이란 필연적으로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흥분과 감격을 전하는 사건 중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번 오스카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의 나비효과를 경험한 한 사람이기도 한데, 오스카 특집을 마련한 SBS <주영진의 뉴스브리핑>에 영화 저널리스트 자격으로 지난 26일과 27일 두 차례 연이어 패널로 출연하며 관련 소식과 견해를 말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한국인 최초의 오스카 배우 수상자가 된 윤여정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낮 뉴스에서도 관심 있게 다룰 정도로 굉장한 화제였음을 입증한다. 심지어 평소 즐겨 듣는 라디오 방송인 KBS 클래식 FM에서도 오스카와 윤여정을 적지 않게 언급했고, <미나리> OST까지 선곡하곤 했다. 윤여정의 오스카 수상이 얼마나 큰 화제인지 방구석에서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2년 연속으로 한국인 수상자가 나온 아카데미 시상식의 가장 큰 수혜주는 지난 2019년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부터 독점 중계를 해온 TV조선이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오스카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며 큰 기대를 모았던 지난 2020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중계 시청률은 6%를 기록했다. 심지어 순간 최고 시청률은 12% 수준에 달했다. 지상파를 포함해 동시간대 최고 시청률이었다. 1%도 채 되지 않았던 2019년 오스카 생중계 시청률과 대조적인 결과다. 그만큼 <기생충>과 봉준호 감독의 오스카 수상 여부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체감하게 만드는 지표나 다름없었다.
올해에도 여우조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 된 윤여정의 수상 기대감이 커지면서 TV조선의 아카데미 시상식 생중계 방송은 6%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순간 최고 시청률은 9%가 넘었는데 윤여정이 여우조연상 수상소감을 발표하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역시 지상파를 포함해 동시간대 시청률 1위에 올랐다. 시차로 인해 국내에서는 오전 9시부터 중계가 되는 시상식임을 고려하면 정말 대단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반대로 미국 현지에서는 올해 오스카 중계 시청률이 지난 10년간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고 한다. 전년 대비 시청인구가 58% 감소했다. 코로나 19 유행으로 인해 예년에 비해 시상식이 간소화되면서 스타 배우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축하공연이 취소되는 등 시선을 끌만한 요소가 부재했던 탓이라는 분석도 이어진다.
예년에 비해 화제작이 드물었던 것도 사실이다. 미국의 극장 통계 사이트 ‘박스오피스 모조’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내 극장 수입은 그 전년과 비교했을 때 80% 이상 하락한 것으로 드러났다. 소위 대작으로 분류되는 상업적인 블록버스터 영화의 개봉이 미비했고, 그만큼 극장가를 찾는 관객 수도 급감했다. 대중적으로 극장 개봉 영화에 대한 관심이 어느 해보다도 미비했던 한 해였던 만큼 오스카에 대한 관심도 예년보다 미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근 10년간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오스카 시상식이 <블랙팬서>와 <보헤미안 랩소디> 같은 대중적인 화제작이 작품상 후보에 올랐던 2019년이었던 것을 염두에 둔다면 올해 미국 내에서 오스카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이유가 더욱 납득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19 유행이라는 팬데믹 속에서 비대면이 아닌 대면 시상식을 펼치려는 노력은 높게 평가할만하다. 현지시간으로 지난 4월 25일 오후 5시에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행사가 열리기까지 어느 해보다도 많은 변수를 고려해야 했다. 코로나 19 유행 여파로 수십 년간 늘 2월에 열리던 시상식이 4월로 미뤄졌다. 수상 후보에 오르지 않았다 해도 LA 돌비 극장을 가득 메웠던 기라성 같은 할리우드 스타들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대신 LA의 오래된 기차역 ‘유니언 스테이션’을 중심으로 LA 돌비 극장과 인원을 나눠 자리한 수상 후보들의 모습을 띄엄띄엄 볼 수 있었다. 코로나 19 감염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시상식 참석자들은 사전에 세 차례에 걸쳐 코로나 19 검사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늘 진행되던 주제가상 부문 후보들의 축하공연 무대도 녹화 방송으로 대체됐다.
가장 기이한 건 작품상 후보를 호명하는 방식이었는데 예년과 달리 올해 오스카는 늘 피날레 무대를 차지했던 작품상 부문 발표를 여우주연상과 남우주연상 부문 발표보다 앞서 발표하며 아카데미 시상식을 꾸준히 시청해온 이들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남우주연상 유력 후보로 꼽히던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의 채드윅 보스만을 추모하기 위한 선택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지만 정작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호명된 건 <더 파더>의 앤서니 홉킨스였다. 그리고 올해 88세의 나이에 역대 최고령 남우주연상 수상자가 된 앤서니 홉킨스는 시상식 현장에도 없었고, 수상소감 없이 시상자로 오른 전년도 수상자 호아퀸 피닉스의 마무리 멘트로 시상식은 끝나버렸다. 작품상을 차지한 <노매드랜드> 팀의 수상소감으로 오스카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 보다 나았을 것이라는 외신의 지적은 이런 변화를 선택하는 과정을 더욱 의아함을 느끼게 만든다.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그리고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실질적인 승자가 된 <노매드랜드>는 코로나 19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등불 같은 여운을 남길 수작이다. <허트 로커>로 오스카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 감독이 된 캐서린 비글로우 이후로 10년 만에 오스카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두 번째 여성 감독이 된 중국인 감독 클로이 자오는 봉준호 감독에 이어 2년 연속으로 아시아인 감독으로서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을 수상하는 진풍경을 선사했다. 무엇보다도 올해 오스카는 예년에 비해 전 부문에 걸쳐 여성 후보가 가장 많은 시상식이기도 했다. 두 명의 여성 감독이 작품상과 감독상 후보에 오른 첫 시상식이기도 했고, 전 부문에 걸쳐 32%를 차지하는 여성 후보의 비율이 가장 높은 시상식이기도 했다.
이는 점차 다양성을 중시하고 확대하겠다는 오스카의 야심과 발을 맞춘 결과로 보인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배우 부문 후보 20명 중 절반에 다다르는 9명이 흑인이나 아시아인이었다는 점은 아카데미 시상식의 이러한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양성을 발견하고 발굴하겠다는 의지는 필요조건이 아닌 충분조건으로서 유효한 것이다. 아카데미가 다양성을 전제로 수상 후보를 선택한다는 편견은 불필요하며 그러한 편견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는 의미다. 작품 자체의 수준을 전제로 수상 후보를 가린다는 시상식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다양성을 고려한다는 것이 아카데미의 의지일 것이다. 그리고 올해 호명된 수상작들은 바로 그런 의지에 걸맞은 이름임에 틀림없다.
윤여정의 여우조연상 수상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특유의 여유로운 유머 감각으로 한동안 세계를 들었다 놨다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윤여정의 수상 소감은 이번 오스카에서도 빛을 발했다. 무엇보다도 자신과 함께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네 명의 배우에게 전하는 위로와 격려는 윤여정이라는 배우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세계에 발 담고 있는 이들의 진심을 대변하는 것이라 감동적이었다. ‘우리는 경쟁하는 사이가 아니다’라는 말은 결국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증명이 된 이들의 자격을 드높이는 것이었다. 후보에 오른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적인 그 자리에 앉아있는 이들의 수상 결과를 성공과 실패로 분류하는 세간의 평가가 얼마나 무색한 짓인가를 새삼 깨닫게 만드는 명연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최고가 아닌 최중이 되자는 윤여정의 발언은 분야를 막론하고 오늘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큰 용기를 준다. 결국 오늘을 살아간 자에게 내일도 거듭 살아가는 오늘이 되는 법이다. 윤여정의 수상소감은 소박하지만 쉽게 간과되는 지혜를 다시 거머쥐게 만들었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살아간다는 것은. 그러니까, 윤여정 원더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