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다 카더와 갤 가돗, 원더우먼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관하여.
1941년, DC코믹스에서 탄생한 원더우먼은 코믹스 산업 안에서 가장 각광받는 슈퍼히어로 캐릭터 중 하나였다. 남성성으로 점철된 슈퍼히어로 세계관 안에서 보기 드물게 대중적인 영향력을 가진 여성 캐릭터였다. 21세기에 이르러 블록버스터 영화로 보다 너르고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슈퍼히어로 세계관에서 <원더우먼>이라는 롤타이틀 영화가 기획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원더우먼은 다양한 슈퍼히어로 세계 안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자 슈퍼맨, 배트맨과 함께 트로이카를 이루는 DC 코믹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1976년부터 1979년까지 미국 ABC TV에서 방영한 TV시리즈 <원더우먼>은 무명 배우였던 린다 카터에게 스타의 지위를 부여한 작품이다. 하지만 린다 카터에게 원더우먼은 마냥 영광스러운 이름이 아니었다. “남편이 아닌 누구에게도 성적 대상이 되고 싶지 않다. 남자 화장실에 내 몸 사진이 붙어있을 거라 생각지도 못했다.” 린다 카터의 원더우먼은 지적이고, 용맹한 슈퍼히어로이기 전에 몸매가 부각되는 의상을 입은 미인으로서 남성팬들의 주목을 받았고, 린다 카터는 원더우먼 코스튬을 입지 않고 있을 때에도 그런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더우먼은 분명 새로운 가능성의 서막을 열어준 작품이었다. “갤 가돗의 원더우먼을 처음 본 딸이 내게 말했다. ‘엄마, 드디어 알았어. 모든 사람들이 왜 엄마를 우상처럼 여기는지 말이야. 원더우먼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마침내 알았어.’ 내 딸이 말이지!” 린다 카터는 <원더우먼>(2017)을 본 딸의 말을 듣고 과거의 영예를 되짚었다. 원더우먼을 스크린에 세운 첫 번째 영화 <원더우먼>에서 주연을 맡은 갤 가돗의 아름답고 강인한 얼굴은 새로운 시대의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이 역할이 너무 기대된다. 여성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엄청난 기회가 주어졌다고 느낀다. 내가 아닌 원더우먼이 누구인지, 무엇을 상징하는지 말이다. 책임감이 크다.” 새로운 원더우먼으로 낙점된 갤 가돗은 원더우먼이라는 영예를 물려받는다는 기대감을 넘어 새로운 시대에 찾아온 원더우먼이 해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늘씬하고 예쁜 외모의 여성 히어로가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코스튬을 입고 악당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한다는 쇼 이상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근육질 남성 슈퍼히어로 옆에 선 액세서리처럼 보여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갤 가돗의 원더우먼은 린다 카터의 원더우먼 의상과 마찬가지로 팔다리의 맨살이 드러나는 전통적인 코스튬을 이어받았지만 가슴을 강조하지 않는 톱과 무릎까지 덮는 부츠를 착용한다는 점에서 성적 대상화의 가능성을 최대한 배제한 흔적이 엿보인다. 물론 맨살이 드러나는 코스튬 자체가 전투 갑옷의 실용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지만 필연적으로 상징적인 코스튬의 이미지로 떠오르는 원더우먼의 형상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 한계 속에서도 기울인 최선의 노력도 인정할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더우먼의 전신 슈트 골든 이글 아머가 등장하는 <원더우먼 1984>(2021)의 클라이맥스는 원더우먼의 역사를 한 걸음 약진시키는 혁신이나 다름없다.
다이애나와 스티브 트레버의 관계 변화 역시 TV 시리즈와 영화의 가장 큰 차이인데 린다 카터의 <원더우먼>에서 다이애나는 미 공군 정보부 소속의 스티브 트레버의 부관으로 소속된 부하로 자리하고 있다. 신분 위장을 위한 설정이라 해도 상징적인 여성 히어로가 수동적인 위치에 놓여있다는 건 분명 아쉬운 면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 <원더우먼>이 스티브 트레버를 다이애나의 연인이자 조력자로 설정한 건 이유 있는 변화인 것이다. 진정한 여성 서사를 통해 상징적인 원톱 여성 히어로를 재현하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갤 가돗이 원더우먼으로 캐스팅됐다는 뉴스가 전해질 무렵 댓글창에는 미스캐스팅이라는 비판이 상당했다. 너무 마르고 가슴이 빈약하다는 등 외모에 대한 지적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외모 비하는 <캡틴 마블>에 캐스팅된 브리 라슨도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원더우먼도, 캡틴 마블도 21세기의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린다 카터의 원더우먼을 보고 자란 갤 가돗의 원더우먼을 보고 자랄 누군가는 또 다른 원더우먼이 될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원더우먼이 올 것이다.
(계간 발행하는 대한항공 기내매거진 'MORNING CALM' 6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