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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Oct 25. 2021

한 장의 민주주의가 허락되기까지

투표권을 행사해야 하는 이유가 궁금한 이들을 위해 권하는 영화 넷.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는 말은 미국의 독립운동을 이끌고 미국의 3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토마스 제퍼슨의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말을 손쉽게 인용하고 수긍하는 건 지난 역사가 이 말을 설득하는 덕분이다. 인류 역사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 아래 만인의 평등을 보장하게 된 건 불과 한 세기 남짓한 일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늘과 같은 세계로 다다르기까지 인류의 역사에는 많은 피가 요구됐다. 그만큼 민주주의라고 하면 혁명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는 이가 많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권력의 구태에 맞선 이들이 흘린 피로 쟁취한 것이 바로 선거할 권리, 즉 참정권이기 때문이다. 만 20세 이상의 성인이 되면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투표권은 쉽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모든 개개인에게 한 장의 투표용지가 주어지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했다. 민주주의의 꽃이란 때가 되면 당연하게 피어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현대 민주주의 역사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 영국도 불과 120여 년 전인 20세기 초에는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서프러제트>는 바로 그 20세기 초 영국에서 투표할 권리를 주장한 여성들에 관한 영화다. 1911년 영국 의회는 세대주이거나 일정 재산을 소유한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끝내 이행하지 않는다. 정치적 판단을 하기에는 여성의 사고 능력이 미숙하다는 이유였다. 결국 1912년 선거법 개정의 부결에 항의하는 여성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경찰의 진압이 만만치 않았지만 시위는 강경했고, 옥중에서까지 단식 투쟁을 이어나갔다.

<서프러제트>의 주인공 모드 와츠(캐리 멀리건)는 어머니의 대를 이어 세탁공장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이다. 당시 활발하게 전개되던 여성 참정권 운동보다도 남편과 아이가 있는 가정을 지키는 것을 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그녀가 열성적인 여성 참정권 운동가 즉 서프러제트가 된 건 누구보다도 활발하게 운동에 참여했던 공장 동료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 덕분이었다. 하지만 당연한 권리를 외치고 주장할수록 사회를 어지럽히는 범법자 취급까지 당하며 가족에게도 모욕적인 대접을 받고 엄마로서의 권리마저 박탈당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같은 상황이었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모드는 물러서지 않는다. 


영국이 1918년에 30세 이상의 특정 여성에게 투표권을, 1925년에 자녀가 있는 어머니의 투표권을 인정한 건 바로 이런 서프러제트들이 포기하지 않고 전개해온 참정권 운동 덕분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여성 참정권이 인정된 건 1948년이었다. 여성이 한 표를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 불과 70여 년밖에 안된 것이다. 이렇듯 투표를 행사할 권리 자체를 얻고자 투쟁한 역사를 대변한 영화가 있다면 소중한 한 표의 위력을 간과하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릴 만한 영화도 있다. 누구에게 투표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부동표를 의미하는 ‘스윙 보터(Swing Voter)’에서 제목을 빌린 <스윙 보트>가 그것이다. 


미국 뉴멕시코 주에서 홀로 어린 딸을 키우는 버드 존슨(케빈 코스트너)은 도무지 철이 들지 못한 아빠다.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지각을 밥 먹듯이 하는 탓에 번번이 직장에서 잘리기 일쑤인 그는 대통령 선거일 아침에도 만취해 자고 있다. 아빠를 대신해 일찍 철이 든 12살짜리 딸 몰리(매들린 캐롤)는 아빠에게 투표를 독촉하고 아빠는 마지못해 일어난다. 하지만 그날도 어김없이 맥주를 마음껏 마시다 취해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투표를 못한 존슨을 투표소 앞에서 기다리는 몰리는 기회를 틈타 아빠 대신 투표를 시도하는데 뜻밖의 정전 사태로 투표용지가 출력되지 않아 투표 서명만 하고 실제 투표를 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투표가 대통령 선거의 향방을 가를 분수령이 된다. 존슨을 대신해 투표 명단에 서명한 몰리로 인해 투표용지를 받지 못한 존슨의 무효표가 집계되고 10일 안에 재투표할 권한이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한 표에 따라 차기 미국 대통령의 향방이 결정될 참이다.

<스윙 보트>는 좀처럼 일어나기 힘들 법한 상황을 그리는 정치적 우화에 가까운 소동극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풍자극이기도 하다. 선거에 일말의 관심이 없던 버드는 유일한 스윙 보터가 됨으로써 대선 후보와 후보 정당의 열렬한 관심사로 떠오른다. 그의 한 마디가 대선의 향방을 가를 단서가 되는 동시에 버드 개인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정책을 국가의 미래 정책처럼 둔갑해 발표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건 유권자로서 버드의 변화다. 버드가 스윙 보터가 되자 미 전역에서 수많은 이들이 버드 앞으로 편지를 보낸다. 대선 유력 후보들의 정책을 좌우할 수 있는 인물이 된 버드에게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를 호소하며 정책적 방향을 제시해달라고 호소한다.

 

버드의 영민한 딸 몰리는 이 모든 편지를 정리해 버드에게 전달한다. 자신에게 쏠리는 대단한 관심에 도취돼 있던 버드는 딸이 정리해준 편지의 내용을 읽어보고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이 겪고 있는 이 대단한 관심이 얼마나 막중한 권한인지 알게 된다. 자신이 쥐고 있는 한 표의 권리가 행사해야 할 책임을 깨닫는다. 투표란 단순한 흥미로 내던지는 한 장의 종이조각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정치인들의 구태의연한 태도에 환멸을 느끼고 정치적 혐오에 빠져들어 투표라는 행위 자체에 회의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한 장의 종이조각은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가능성이 잠재돼 있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그 종이조각 한 장을 신중하게 다루지 못한다면 역시 생각 이상으로 불필요한 기회비용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투표란 중요한 권리이자 책임이다. 한 장의 선택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한 발 앞으로 내딛게 만들기도 하지만 한 발 뒤로 물러나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모든 선택이 늘 최선이 될 순 없는 노릇이다. 선거철만 되면 후보자가 된 정치인들이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감언이설 같은 공약을 남발하는 것 같다고 느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투표라는 것이 늘 최선의 선택을 종용하는 건 아니다. 최선이 아닌 차선을,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 투표라는 속설 또한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잘못된 선택이 늘 최악의 결과로 남겨지는 것도 아니다. 1976년작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은 바로 그런 사례에 관한 영화다. 더스틴 호프먼과 로버트 레드포드라는 당대의 배우가 출연한 이 작품은 1972년에 벌어진 미국 워터게이트 사건을 배경에 두고 있다.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된 이들에 관한 진실이 은폐되는 정황을 포착하고 집요하게 파고든 <워싱턴 포스트>의 두 기자로부터 시작된 나비효과에 관한 이야기다.

차기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는 닉슨 대통령 임기 중에 벌어진 워터게이트 사건은 결국 재선에 성공한 닉슨의 발목을 잡고 그를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게 만든 희대의 사건이다. 하지만 이를 공론화하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최고 권력을 상대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적지 않았다. <워싱턴 포스트>의 두 기자는 그런 부담감을 이겨내고 국민의 알 권리를 전한다는 기자로서의 직분에 집중한다. 경쟁 당사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도록 지시한 이가 재선을 노리는 현직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자 관련 인사를 찾아가 질문하고 거듭 닫히려는 문을 열어젖힌다. 


수많은 이들이 권력 비리 앞에서 침묵할 때 끝까지 질문을 던지고 발품을 팔며 위협에도 굴하지 않은 두 기자의 집념과 신념은 결국 재선에 성공한 닉슨의 권력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리고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은 그 모든 집념과 신념을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집중할 뿐 그 결과를 승리처럼 포장하며 도취하지 않고, 카타르시스를 연출하지 않는다. 진실을 규명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릴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누군가는 진실을 추구하며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투표라는 것은 단 한 번의 선택일 뿐, 그 선택의 결과에 일방적으로 끌려가야 할 필요는 없다는 의미다.


물론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투표로 선택한 결과가 늘 그 자리를 보전해야 하는 의무는 아니라는 것이다. 정치인을 선택하는 이유는 그에게 만인의 공정한 권리를 대변하는 위임하는 것이지 무한한 권력을 쥐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선거 이후로 결정한 대변인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있지 않다고 여겨질 때에는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행사한 한 표의 무게를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한 표의 결과에 지레 겁을 먹고 회피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한 표를 행사하고 이를 통해 자신이 위임한 권리를 감시할 책임을 느끼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선거에 나선 후보자의 공약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한편으로 상대적으로 눈에 익은 후보에게 마음이 가서 한 표를 행사하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래서 선거에 나선 후보들은 유권자의 마음을 공략하는 말에 신경을 쓴다. 그래서 종종 선거와 정치는 코미디의 소재가 되곤 하는데 <정직한 후보>는 바로 그런 후보의 말을 유희하는 풍자적인 코미디 영화다. 3선 국회의원 직을 유지하기 위해 일상까지 위장하는 주상숙(라미란)에게 거짓말이란 밥 먹기보다 쉬운 일이다. 심지어 그는 살아있는 할머니의 부고까지 팔아서 자신의 재선 캠페인에 활용한다.

문제는 할머니의 소원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할머니의 소원이 손녀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진실된 사람이 되길 원한다는 것이다. 거짓말처럼 소원이 이뤄진다. 하루아침에 진실을 말하는 자가 돼버린 주상숙은 스스로 자신의 허물을 털어놓는 입으로 인해 온갖 곤혹을 치른다. 하지만 실전은 기세다. 거짓말을 피할 수 없으니 솔직함을 무기로 삼아 전세를 역전하자는 책략으로 선거 운동을 밀어붙인다. 그렇게 정직한 후보가 돼서 유권자를 매료시킨다. 하지만 그 과정까지 거짓말이 되진 않는다. 참말을 뱉는 입은 그가 했던 거짓말이 만들어낸 거짓된 세계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렇게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게 만든다. 그리고 진짜 정직한 후보로 거듭난다.


실제로 이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영화다. 하지만 영화란 관객의 마음을 대변하는 공감의 창이자 이상을 설득하는 문이기도 하다. <정직한 후보>는 유권자이기도 한 관객의 마음을 그렇게 건드린다. 마냥 웃을 수 없을 것 같은 현실을 풍자해 포복절도하게 만들며 결국 정치라는 것도 사람 사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그러니까 유권자로서 현명해지는 건 참 쉬운 일이 아니다. 정치인의 세 치 혀에 넘어가 한 표를 손쉽게 버렸다는 자괴감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표란 실로 중요한 일이다.


앞서 말했듯 인류는 지금의 시대를 만나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견뎌야 했다. 그 오랜 불평등의 시대를 지나 비로소 평등의 시대로 다다른 우리에게 주어진 한 장의 투표용지는 그만큼 값지고 귀한 것이기에 포기해선 안 되는 것이다. 그 결과가 결코 의도하지 않은 것일지라도 말이다. 미국의 건국 영웅으로 꼽히는 벤자민 프랭클린은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란 두 마리의 늑대와 한 마리의 양이 저녁식사로 무엇을 먹을지 투표하는 것이며 자유란 완전무결한 양이 투표 결과에 항의하는 것이다”    


그렇다. 한 번의 선택이 많은 것을 좌우하지만 그 선택이 꼭 모든 것을 결정하는 건 아니다. 우리에게는 실패를 만회할 시간이 있다. 투표란 결국 우리가 지나온 시행착오의 역사를 보다 간편하고 신속하게 통과할 수 있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게 민주주의다. 지지하는 후보에게 한 표를 선사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 한 표를 행사한 이후에도 그 한 표의 권리와 책임을 끝까지 놓지 않는 것이 보다 중하다. 


선거란 일방적인 신앙도 아니고, 일회성 도박도 아니다. 한 번의 지지가 끝까지 이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표를 던진 결과를 그저 구경만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지지한만큼 비판할 수 있고, 한 표를 행사했다면 끝까지 그 한 표의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선거가 끝났다고 유권자의 힘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선거가 끝나면 오히려 유권자의 권리를 기세등등하게 요구해야 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양한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봉사할 기회를 준 것이므로, 한 표를 부탁하던 그들의 입이 발의 실천으로 이어지는지 지켜보고 이행할 것을 명령해야 한다.


그렇게 인류는 한 장의 투표 용지를 만인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을 견뎌왔고, 그렇게 오늘로 왔다. 앞서 소개한 영화들은 그러한 역사의 기록이자 그러한 역사로부터 길어 올린 의식의 반영이며 그러한 역사를 통해 나아갈 미래의 소명일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쌓아 올릴 수 있는 민주주의의 역사를 포기하지 말라. 한 장의 위대함을 꼭 행사하시라. 그 한 장에 걸린 민주주의의 미래를 꼭 즐기시라. 귀한 역사로 길어올린 한 표를 꼭 행사하시라. 당신이라는 민주주의를 보여달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공식블로그에 기고한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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