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미에르 형제와 조르주 멜리에스로부터 시작한 영화의 역사에 관하여.
우연과 필연의 연관성을 따지는 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질문처럼 흥미롭지만 부질없는 도돌이표에 갇히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과를 살필 수밖에 없는 건 그것이 끝내 세상의 변화를 서사적으로 납득시키는 흥미를 유발시키는 덕분일 것이다. 동시대에서 가장 강력한 서사적 유희를 전달하는 오락적 영화 역시 우연을 통해 잉태된 필연적 결과였다.
1895년 12월 29일, 프랑스 파리에 자리한 한 카페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입장료 1프랑을 낸 그들 앞에 텅 빈 벽이 있었다. 곧 불이 꺼졌다. 그리고 곧 텅 빈 벽에서 기차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몇몇 사람은 뒤로 달아나기도 했다. 이것이 최초의 영화라 불리는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이 대중 앞에 첫 선을 보이는 자리였다.
시네마, 즉 영화라는 의미를 최초로 품고 통용된 이 단어는 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한 시네마토그라프라는 카메라 영사기에서 빌려온 언어이기도 하다. 이는 작은 구멍을 통해 오직 한 사람만 움직이는 사진을 볼 수 있었던 토머스 에디슨의 영사기의 단점을 보완한 결과물이었다. 그럼으로써 여러 사람이 동시에 움직이는 사진을 관람하도록 이끈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은 인류 최초의 영화 상영작이었던 셈이다.
뤼미에르 형제는 영화라는 매체를 발명해낸 첫 번째 감독이라면 영화에 예술성을 불어넣은 첫 번째 감독은 아마 조르주 멜리에스일 것이다. 본래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마술사였던 그는 1896년 영국인 발명가 로버트 윌리엄 폴에게 영사기를 구입해 그것을 개조한 뒤 영화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멜리에스의 영화는 일상적인 풍경을 기록한 뤼미에르 형제의 결과물과 결이 달랐다. 그는 영화사에 있어서 최초의 장르를 제시한 감독이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그런 시도를 염두애 둔 것은 아니었다. 우연한 발견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어느 날 오페라 극장 광장에서 촬영 중이던 멜리어스의 카메라가 갑자기 작동을 멈췄고, 멜리에스는 다시 카메라를 작동시켜 촬영을 이어나갔다. 그 뒤 필름을 현상하던 멜리에스는 예기치 못한 장면을 보게 된다. 길을 지나가던 마차가 갑자기 영구차로 변한 것이다. 거리를 지나가던 마차의 모습을 포착한 카메라가 작동을 멈췄고, 촬영을 재개할 당시 카메라 앞을 지나던 영구차의 모습이 이어진 결과였다. 촬영을 재개한 순간에 카메라 앞을 우연히 영구차가 지나간 덕분에 얻어낸 장면이었다. 그리고 멜리에스는 이를 흥미로운 힌트라 여겼다.
멜리에스는 트릭 영화라고 불리는 장르의 장르를 개척했다. 그는 1912년까지 5000편이 넘는 영화를 촬영했고, 다양한 기술적 시도를 이어나갔다. 페이드, 디졸브, 고속촬영, 이중노출 등 오늘날 익숙한 영화적 특수효과는 당시 멜리에스의 작품을 통해 발굴된 영화적 유산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이는 영화가 기록의 산물이 아니라 연출과 편집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 첫 번째 주장이 된 셈이기도 했다.
오늘날 당연하게 여겨지는 수많은 촬영술과 편집술은 멜리에스의 우연한 발견을 통해 탄생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현대의 영화들은 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한 영화라는 기술적 토대 위에서 멜리에스가 발견해낸 예술적 가능성의 결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후대의 감독들이 영화 연출과 편집의 시도와 발견을 이어갈 수 있었던 최초의 단서이자 영감이 됐다.
사실 뤼미에르 형제가 <열차의 도착>처럼 존재하는 현실만을 기록한 작품만을 남긴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물 뿌리는 정원사>와 같은 작품처럼 코믹한 상황을 연출한 결과물도 남겼다. 하지만 뤼미에르는 영화가 대중적으로 각광받는 예술 혹은 오락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의 예견과 다른 현실로 나아갔다. 어쩌면 영화에 있어서 가장 큰 우연이란 바로 이런 역설일지도 모르겠다.
(현대모터그룹에서 발행하는 매거진 <모터스라인> 2019년 7월호에 게재된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