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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Dec 08. 2021

슈퍼맨은 돌아온다

슈퍼히어로 세계의 알파 히어로, 슈퍼맨이라는 역사에 대하여.

태초에 슈퍼맨이 있었다. 디텍티브 코믹스, 즉 DC 코믹스에서 1938년에 발행한 코믹북 <액션 코믹스> 창간호에 처음 등장한 슈퍼맨과 함께 슈퍼히어로의 시대가 열렸다. 유년시절부터 SF 물을 좋아하는 취향 안에서 공고한 우정을 쌓아온 스토리 작가 제리 시겔과 그림 작가 조 슈스터가 창조해낸 슈퍼맨은 세상에 없던 초인적인 영웅이었다. 만화상에서 등장한 슈퍼맨은 처음부터 하늘을 나는 존재는 아니었지만 대단한 점프력으로 고층 건물을 뛰어넘고 기관차보다 빠르게 달리며 총알을 튕겨내는 강철 피부를 가진 초인이었다. 

<액션 코믹스> 창간호 표지에 처음 등장한 슈퍼맨

코믹북 캐릭터로 처음 등장하자마자 코믹북 시장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정도로 큰 인기를 모은 슈퍼맨은 초인적인 영웅이기도 했지만 모범적인 가치관을 가진 절대선의 존재라는 점에서 각광받았다. 큰 힘을 갖고 있지만 결코 타락하지 않는 선한 영웅의 등장이란 1930년대 경제대공황의 대혼란을 겪은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신적 메시아의 출현에 가까웠다. 심지어 1939년에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한 미국이 패권 국가로서의 위치를 점하는 과정에서 미국을 기반에 둔 슈퍼히어로의 탄생이란 여러모로 상징적인 지위를 부여하게 만드는 현상이나 다름없었다.


슈퍼맨의 입지가 ‘로컬이 아닌 글로벌’로 확장된 건 할리우드의 힘이었다. 코믹북을 넘어 슈퍼맨을 등장시킨 TV시리즈도 멏 차례 제작된 바 있지만 1978년에 개봉한 <슈퍼맨>은 슈퍼맨을 프랜차이즈 아이콘으로 띄워 올린 첫 번째 사례이자 슈퍼히어로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을 증명한 최초의 성공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영화로 평가받는다. 심지어 마블 스튜디오의 MCU를 이끄는 수장 케빈 파이기도 리처드 도너가 연출한 <슈퍼맨>을 지금까지 등장한 슈퍼히어로 원작 기반 영화 가운데 최고작으로 꼽는다고 말한 바 있다.

<슈퍼맨> 촬영장의 리처드 도너(왼쪽)

<슈퍼맨>은 당시로선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던 5천5백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인 탓에 적지 않은 우려를 얻었지만 전 세계적으로 3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벌어들였다. 속편 제작은 당연한 것이었다. <슈퍼맨>에 이어 감독을 맡은 리처드 도너가 제작자와의 갈등으로 해임되는 등의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슈퍼맨 2>(1980) 역시 준수한 평가와 세계적인 흥행을 거뒀다. 하지만 그 이후로 제작된 속편은 슈퍼맨의 명성에 오점을 더해갔다. 심지어 주연을 맡은 크리스토퍼 리브가 자서전을 통해 ‘재앙(catastrophe)’이라고 언급한 바 있는 <슈퍼맨 4>는 평단의 혹평과 대중의 외면을 받으며 프랜차이즈의 역사를 멈춰 세웠다.


그 뒤로 19년 만에 제작된 <슈퍼맨 리턴즈>(2006)는 <엑스맨> 프랜차이즈를 이끈 감독 브라이언 싱어의 연출로 기대를 모은 리부트 작이었다. 하지만 배트맨과 같은 안티 히어로가 인기를 끌던 21세기에 개인적인 고뇌가 없는 선한 영웅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부진한 성적을 기록한다. 그렇게 할리우드 역사의 뒤안길로 다시 사라지는 듯했던 슈퍼맨이 다시 부상한 건 마블 스튜디오의 MCU가 거둔 대대적인 성공에 자극을 받은 워너 브라더스의 DCEU 즉 DC 확장 유니버스 영화의 계획과 함께였다.

<300>(2007)과 <왓치맨>(2009)을 통해 감각적이면서도 괴력적인 액션 연출에 대한 재능을 보여준 잭 스나이더에게 메가폰을 맡긴 <맨 오브 스틸>(2013)은 ‘강철의 사나이’라는 전통적인 별명을 앞세워 슈퍼맨의 영광을 재현하는 영화였다. 배트맨을 ‘다크 나이트’로 명명한 크리스토퍼 놀란이 제작자로 참여한 작품이란 것도 이러한 작명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데 <맨 오브 스틸>은 지금껏 영화화된 슈퍼맨이 보여준 최상의 파괴력을 마음껏 전시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뇌하고 갈등하는 개인적인 심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과거와 차별화된 작품이었다. 


그러니까 21세기의 슈퍼맨은 여전히 ‘강철의 사나이’지만 더 이상 어리숙하게 굴며 신분을 속이고 마냥 선하기만 한 공적인 슈퍼히어로가 아니다. <맨 오브 스틸>의 연장선에 놓인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2016)에서는 신적인 괴력을 지닌 슈퍼맨과 그의 타락을 우려한 배트맨의 대결을 그리는데 서로 동일한 선을 추구하지만 힘에 대한 관점이 다른 두 영웅의 대결을 그린 블록버스터는 그 자체만으로도 관객의 흥미를 자극하는 이벤트였다. 그리고 배트맨과 원더우먼, 아쿠아맨 등 DC코믹스 출신 슈퍼히어로들이 한데 모인 올스타전이라 할 수 있는 <저스티스 리그>(2017)에서 그려지는 슈퍼맨의 ‘흑화’된 모습은 절대선의 이면을 보여주는 특별한 쇼에 가깝다.

이렇듯 슈퍼맨이라는 선한 영웅은 시대가 보고자 하는 영웅상이 반영된 형상으로 거듭 돌아왔다. 또 한 번 세상을 구한다. 그리고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선한 영웅을 믿을 수 있을까? 인류의 미래를 좌우할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에게 의존하는 세계란 안전한 걸까? 과연 우리는 구원받을 만한 존재인가? 결국 슈퍼맨은 동시대 인류의 내면 심리와 마주한 거울 속 영웅과도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슈퍼맨은 돌아온다. 돌아올 수밖에 없다.


(계간 발행하는 대한항공 기내매거진 'MORNING CALM' 12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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