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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Sep 25. 2021

킹콩은 그렇게 순정마초가 됐다

괴력의 괴수를 넘어 마성의 매력을 자랑하는 킹콩이 오늘로 오기까지.

‘킹콩의 아버지’라 불려도 좋을 메리언 C. 쿠퍼는 유년시절부터 모험에 관심이 많았고, 일찍이 고릴라에 매료됐다. 뉴욕 탐험가 클럽의 회원이기도 했던 그는 아프리카 정글에서 찍은 자연 다큐멘터리를 연출했지만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런 그의 꿈에 거대한 고릴라가 찾아왔다. 뉴욕 한복판에 나타난 거대 고릴라가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만드는 꿈을 꿨다. 그리고 꿈에서 어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던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꼭대기에서 비행기와 싸우는 거대한 고릴라를 상상했다. 유년시절부터 그를 매혹했던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그렇게 꿈의 영화를 찍기로 했다. 거대한 고릴라 형상의 괴물이 산다고 전해지는 해골섬에 가서 영화를 찍겠다는 <킹콩>(1933) 속 영화감독 칼 덴헴은 메리언 C. 쿠퍼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메리언 C. 쿠퍼와 <킹콩>(1933)에서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간 킹콩이 나오는 장면.

메리언 C. 쿠퍼의 <킹콩>은 극 중 대사로도 언급하는 고전동화 <미녀와 야수>에서 뼈대를 빌린 작품이다. 하지만 영화 속 킹콩은 미녀를 탐하고 인간을 적대하는 야수일 뿐, 특별한 공감대를 느낄 수 없는 존재였다. 뉴욕까지 끌려온 킹콩의 죽음을 그린 결말에서 특별한 연민을 느낄 수 없는 건 그런 킹콩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할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워링>을 연출한 흥행감독 존 길러만의 <킹콩>(1976)에서부터 미녀와 교감하는 킹콩은 1933년의 킹콩에 비해 낭만적인 감정이 느껴지는 존재였고, 보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캐릭터로 진화하는 계기가 됐다.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를 연출한 피터 잭슨의 <킹콩>(2005)은 메리언 C. 쿠퍼의 비전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하는 동시에 존 길러만의 해석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며 <킹콩>을 가장 성공적으로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꼽히는 걸작이다. 1930년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CG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킹콩이 살아가는 해골섬의 풍경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피터 잭슨의 <킹콩>은 무시무시한 지옥도를 묘사하는 동시에 킹콩을 여느 인간 캐릭터보다도 로맨틱한 화신으로 그려낸다. 스펙터클한 어드벤처 괴수물로서의 카타르시스를 극대화시키는 동시에 로맨틱한 멜로의 페이소스를 입히며 킹콩에게 매력적인 순정마초 아이콘의 지위를 부여했다.

<킹콩>(2005)과 <콩: 스컬 아일랜드>(2017)

최첨단 CG 기술로 무장한 블록버스터에 익숙한 지금의 관객에게 1933년의 <킹콩>은 여러모로 어색한 작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기법을 비롯해 미니어처와 매트 페인팅 등 당대의 특수효과 촬영 기술을 총동원한 결과물로 당시에는 대단한 기술적 성취를 인정받았고, 이후 영화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과거에 구현할 수 없던 상상을 가능하게 만든 오늘날 CG의 발전은 킹콩의 역사에도 새로운 숨을 불어넣었다. 고질라와 킹콩의 대결을 그린 <고질라 VS. 콩>(2021)이 바로 그것이다. 본래 일본의 인기 괴수물 캐릭터였지만 할리우드까지 진출한 고질라의 두 번째 미국 리메이크 영화 <고질라>(2014)의 흥행은 그런 야심을 구체화시키는 신호탄이 됐다. 그리고 <콩: 스컬 아일랜드>(2017)와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2019)는 고질라와 킹콩이라는 최강의 괴수 아이콘의 타이틀매치를 만들기 위한 전초전이 된 작품이다.


흥미로운 건 두 작품에서 묘사하는 킹콩과 고질라가 인류를 위협하는 괴수가 아니라 지구를 지키는 수호신이자 자연신에 가깝게 그려진다는 점이다. 인류가 맞설 적이 아니라 인류가 지지해야 할 아군으로 등장하는 킹콩과 고질라는 관객의 애정 어린 시선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슈퍼히어로 같은 존재다. 결국 <고질라 VS. 콩>은 지구를 파괴하는 두 괴수의 대결을 그린 작품이 아니라 지구를 지키는 초거대히어로의 아이러니한 충돌을 그리는 작품이다.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의 충돌을 그린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 같은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간 괴물로 기억되던 1933년의 킹콩은 21세기에 이르러 낭만과 연민을 부르는 캐릭터로 거듭났다. 감정을 읽을 수 없던 미니어처 인형과 달리 반짝이는 눈빛으로 갖가지 감정을 전하는 CG 기술의 총아로 재탄생했다. 공포의 대상에서 로맨틱하고 듬직한 대상으로, 낭만과 신뢰의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그야말로 로맨틱하고 성공적인 변신, 순정마초 킹콩의 시대다.


(계간 발행하는 대한항공 기내매거진 'MORNING CALM' 9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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