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용준 Aug 20. 2021

'인질' 황정민이라는 이름으로

황정민으로 차린 밥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영화 '인질'에 관하여.

황정민이 납치됐다. 실화가 아니다. 그런데 정말 납치되긴 했다. 영화 <인질>은 제목처럼 황정민이 인질이 된다는 설정의 스릴러물이다. 말 그대로 황정민이 황정민하는 영화인 셈이다. 아직도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 이가 있을지 모르니 좀 더 친절하게 부연하자면, 황정민이 주연을 맡은 영화 <인질>은 황정민이 본인의 이름 그대로 영화배우 황정민을 연기하는 영화이며 정체불명의 무뢰한들에게 난데없이 납치돼 인질이 된 황정민에 관한 영화라는 말이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그 유명한 ‘밥상’ 수상소감 장면을 비롯해 배우 황정민의 실제 모습을 전시하듯 나열하는 <인질>은 그렇게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미묘하게 뭉개며 시작한다. 마치 밥상에 숟가락을 얹듯이 허구에 얕은 현실감각을 가미하며 일종의 가이드 라인을 제시한다. 진짜는 아니지만 진짜 같은 흥미를 선사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그리고 황정민의 진짜 같은 일상이 이어진다. <냉혈한>이라는 신작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열린 제작보고회 현장에서 사진 기자를 앞에 두고 다양한 포즈를 취하는 황정민의 모습은 지극히 현실적인 일상의 재현에 가깝다.

<인질>은 목적지를 향해 곧바로 돌진하는 영화다. 황정민 납치라는 영화적 사건으로 진입하기까지 많은 시간을 소요하지 않는다. 극적인 내러티브를 만들어줄 간단한 복선 몇 가지를 미리 묻어두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냥 밀고 나간다. 납치 과정은 교통 사고처럼 돌발적이며 특별한 인과도 없다. 황정민이 납치된 건 그가 유명 배우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가 없다. 이전 상황보다 이후 상황이 중요하다. 즉흥적이며 충동적인 사건의 원인을 밝히는 것보다도 그 사건 이후의 상황을 끝까지 주목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목표인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정민이라는 이름 석 자를 담보로 기획된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제 담보는 따로 있다. 중국의 유명 가수이자 배우인 ‘오약보’가 술집에서 나오다 경찰을 사칭하는 괴한들에게 납치된 뒤 만 하루만에 범인을 찾아낸 경찰 수사로 풀려나게 된 사건을 영화화한 <세이빙 미스터 우>가 원작인 것. 유덕화가 납치된 유명 배우를 연기하며 주연을 맡은 가운데 자신의 납치 사건을 그린 이 영화에서 오약보는 형사로 출연하며 화제를 모았다. 결국 실화를 바탕에 둔 <세이빙 미스터 우>는 <인질>의 원안이나 다름없고 실제로 영화의 양상도 엇비슷하지만 현실성의 중력이 자리하는 곳이 각기 다르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벌린다. 

<인질>을 연출한 필감성 감독의 말에 따르면 <세이빙 미스터 우>보다도 영화의 모티브가 된 오약보 납치 사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먼저 보고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인질>은 ‘황정민’이라는 이름 석 자에서 출발한 영화가 아니지만 황정민이 연기하는 황정민이 납치되는 사건을 그리며 참말 같은 거짓말이 된다. 반대로 <인질>의 원안이나 다름없는 <세이빙 미스터 우>는 실화를 바탕에 두고 재현하듯 이야기를 풀어나간 영화이지만 진짜처럼 굴지 않는다. 거짓말 같은 참말로서 실화와 거리를 두고, 영화의 끝에서 실제 배우의 공연 모습을 노출하며 그 거리감을 명확하게 보존한다.


그러니까 <인질>은 대단히 사실적인 척하지만 비교적 안전한 리얼리티 안에서 연출된 쇼라는 것도 크게 숨기지 않는 엔터테인먼트다.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다’는 수상소감과 ‘드루와’라는 대사로 명확하게 인지되는 황정민이라는 자연인도, 배우도, 황정민이 연기하며 신선한 리얼리티를 획득함으로써 보다 흥미진진하게 허구의 세계를 내부적으로 강화한다. 반대로 <세이빙 미스터 우>는 실화를 바탕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보다 허구적인 연출에 중점을 두고 보다 영화적인 인상을 강화함으로써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의 중량감을 더욱 무겁게 인식하게 만든다. 극적인 설득력을 외부로부터 강화하는 셈이다.


그만큼 <인질>의 중력은 황정민이라는 실물이자 가상으로부터 형성되는 것이니 극 안에 자리한다면 <세이빙 미스터 우>의 중력은 유명 배우가 납치된 실제 사건이라는 현실로부터 형성되는 것이니 극 밖에 자리한 것이다. <인질>은 결국 배우가 납치됐다는 실제 사건을 바탕에 둔 허구로부터 발상한 아이디어를 자신이 반영된 캐릭터를 직접 연기하는 배우의 출연이라는 착상으로 이어가며 독자적인 노선을 확보한 셈이다. 다만 그만큼 명확한 캐릭터를 가진 배우의 존재감은 충분조건이 아닌 필요조건이었다. 

황정민은 <인질>의 알파이자 오메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중에서도 언급되는 ‘천만배우’이기도 한 연기력과 대중성을 모두 인정받은 배우다. 유명한 배우로서 존재감이 뚜렷한 동시에 배우로서의 면모가 자연인으로서의 면모와 크게 동떨어져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질>이 그리는 현실성에 부합하는 캐릭터처럼 보인다. 어디서든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유명세를 갖고 있지만 길을 걷다 만나도 위화감이 들지 않을 듯한 이미지의 배우라는 점에서 <인질>의 내러티브를 온전히 설득한다. 동시에 스릴러 장르를 잘 소화하는 배우라는 점에서 영화보다 더 극악한 현실을 맞닥뜨리게 된 아이러니가 지난 경력을 통해 더욱 강화되는 인상이다.


그런 면에서 <인질>은 황정민의 존재감을 통해 많은 것을 해결한 영화라 볼 수 있는데 덕분에 주변의 조연 캐릭터들의 집중도도 함께 살아나는 인상이다. 주축이 되는 황정민이 온전히 무게중심을 잡고 영화의 구심점 역할을 확실하게 책임진 덕분에 악역을 맡은 조연 캐릭터들도 하나씩 자기 존재감을 착실히 쌓아가는데 무리가 없다. 그런 면에서 <인질>은 황정민이 차린 밥상에서 숟가락을 얹을 기회를 얻은 조연배우들의 얼굴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작품이 된다. 대부분 자기 역할을 명확히 해내는 조연배우 중에서도 냉혈하고 잔인한 리더 최기완을 연기하는 김재범과 황정민 팬을 자처하며 뜻밖의 웃음을 자아내는 납치범 일원 중 하나인 용태 역의 정재원이 눈에 띈다.

극 중간에 등장하는 카체이싱 신과 추격 신에서 선사하는 속도감과 박진감은 납치 사건이라는 단조로운 테마에 변주를 가미하고 악센트를 찍기 위한 방편처럼 보이는데 전반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직선 주행하는 서사 안에서 무난하게 흘러가는 인상이다. 그만큼 영화적 특징이 무딘 작품이지만 결국 황정민의 호연 안에서 모든 장단점이 수렴하고 무마되는 인상이다. <인질>은 그만큼 좋은 배우의 재능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한데 좋은 배우는 큰 변신보단 미묘한 변주를 통해 일관성과 의외성을 복합적으로 전달하는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황정민은 황정민하고, 그렇게 영화의 멱살을 끌고 간다. 인질을 연기할 뿐, 관객을 낚는 영화의 인질이 되지 않는다. 


('예스24'에서 운영하는 션 웹진 <스냅>에 연재하는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감독 김종관, 걷고 내디디며 나아간 세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