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우디 앨런이 있다면 서촌에는 김종관이 있다는 말을 종종 반쯤 농담처럼 발음하곤 하는데 사실 반쯤은 진담이다. <최악의 하루> <더 테이블> <아무도 없는 곳>까지, 김종관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서촌이란 작가로서의 인장을 찍는 창작적 영토처럼 보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특정 감독의 연출적 특징을 설명하는데 특정 지역을 언급할 수 있다는 건 결코 흔한 사례가 아니다. 이를 테면 뉴욕을 배경으로 촬영한 영화가 적지 않지만 뉴욕이라는 도시를 바탕으로 떠올릴 수 있는 감독 이름이 몇이나 되는지 생각해보자. 우디 앨런 그리고 마틴 스코세이지 그리고 또 누가 있는가.
우디 앨런과 마틴 스코세이지는 모두 뉴욕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한 명은 유대인 가정에서, 한 명은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자라났다. 우디 앨런의 스크루볼 코미디와 마틴 스코세이지의 필름 누아르가 뉴욕의 풍광 안에 자리한 건 그들의 태생적 뿌리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이방인들이 뒤섞인 코스모폴리스의 아이러니와 딜레마가 한 사람의 영화에서는 수다스러운 해학으로, 다른 한 사람의 영화에서는 폭력적인 비유로 발전한다. 그렇게 자신이 보고 듣고 자란 풍경을 반영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결국 어느 특정 지역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영화란 그의 관점이 투영된 시선의 캔버스로 기능하는 지정학적 영향력을 함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미장센의 세계인 셈이다. 김종관 감독의 영화에 거듭 등장하는 서촌이라는 지역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도 그의 영화를 이야기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수순인 셈이다.
종종 늦은 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택시 기사로부터 적지 않게 듣는 말이 있다. “이 동네 정말 오랜만인데, 하나도 안 변했네.” 그렇다. 서촌은 기십년만에 찾아도 크게 변하지 않은 외관을 지닌 동네다. 그만큼 나이 든 사람들도 많이 살고, 오래된 건물도 많다. 한편으론 경복궁역 주변이라고 하면 ‘아, 서촌?’이라고 이해할 정도로 젊은 세대에게도 인지도가 높은 ‘핫플’이다. 그러니까 서울이라는 메가시티의 격변 속에서도 보존된 낭만과 정체된 퇴락이 함께 거주하는 동네가 서촌이다. 난개발의 도시 안에서 강줄기처럼 멋대로 뻗어나간 골목은 선명하지만 내밀하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듯하지만 서서히 변해가는 세월의 흔적이 침식하고 퇴적하듯 굽이굽이 흐르고 멈추며 공존한다. 어쩌면 서촌에서 산다는 건 좀처럼 좁힐 수 없는 세월의 등을 쫓는 이방인의 시간을 따라 걷는 것일지도 모른다.
<최악의 하루> (2016)
<최악의 하루> (2016)
<최악의 하루> (2016)
<최악의 하루>에서는 본의 아니게 서촌의 골목을 누비게 되는 일본인 소설가가 등장한다. 한국 출판사에서 마련한 출간기념회를 위해 서울을 찾은 그에게 서촌의 골목이란 낯선 미로다. 그런 그가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서촌의 골목을 돌고 돌아 처음 방문하게 된 카페로 같은 날 자신의 출간기념회에 방문한 두 사람의 관객을 이끌고 가는 장면은 그 자체로 웃음기를 머금게 만들며 코미디를 강화한다. 이는 서촌의 골목을 경험하고 느낀 특별한 인상이 반영된 결과처럼 보인다. 감독 스스로가 이방인이 돼서 누빈 서촌의 골목에서 거듭한 소소한 발견과 모험의 여정이 고스란히 영화적 세계로 승화된 셈이다.
<더 테이블>은 만 하루 동안 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담아낸 이야기다. 시간차를 두고 카페를 찾은 네 커플의 대화를 이어가는 부조리극 형식의 영화다. 정유미, 정은채, 한예리, 임수정 등 주연급 배우가 더러 등장하지만 불과 7회 차 만에 영화를 완성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카페의 손님이다. 저마다 각기 다른 사연을 품고 각기 다른 대화의 양상을 보이며 각기 다른 분위기를 전하지만 서촌이라는 공간 안에서 하나 같이 이방인의 공통분모 위에 놓인 사람이 된다. 매일 같이 적지 않은 이들의 약속 장소로 활용되는 서촌의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한 실제적인 무대를 설계한 셈이다.
<밤을 걷다>의 순라길과 <아무도 없는 곳>에서의 서촌은 존재와 부재 그리고 꿈과 현실 사이의 어딘가에 놓인 영토 같다. 산책을 하는 남녀의 대화로 시작하는 <밤을 걷다>의 순라길은 언제 들어섰는지 알 길이 없는 꿈의 영역으로, <아무도 없는 곳>에서의 서촌은 주인공이 두 발을 딛고 걷는 현실의 세계이기에 생생하게 재현되는 꿈의 영토로 등장한다. 이는 실제와 허구 사이를 거니는 김종관 감독의 일상과 무관하지 않다. 스스로를 ‘걷기 성애자’라 지칭하는 김종관 감독의 두 영화에서 삶과 꿈으로 교차하는 두 길의 풍경은 골목과 골목을 진짜 걷고 걸으며 창작의 실마리를 쫓아갔을지도 모를 김종관 감독의 뒷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더 테이블> (2016)
<더 테이블> (2016)
<아무도 없는 곳> (2021)
<아무도 없는 곳> (2021)
<아무도 없는 곳> (2021)
김종관 감독의 영화에서 서촌이 주무대가 된 건 어쩌면 저예산 영화가 감당해야 하는 시행착오의 기회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이었을지도 모른다. 잘 아는 공간을 주요 무대로 활용하며 최적의 동선을 확보하는 노력의 일환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작가로서 이어갈 이야기의 방향을 발견하는 여정이 된 것처럼 보인다는 건 분명 흥미로운 결과다. <최악의 하루>부터 <아무도 없는 곳>까지, 서촌이라는 공간을 거듭 영화 속에 담아내는 창작자의 경험과 서촌을 거닐며 생활하는 자연인의 일상이 교차편집하듯 반복되는 경험으로 축적되면서 실제와 가상이라는 양가적인 체험을 관객에게도 제시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발전한 것 같다.
이런 확신은 보다 적극적인 영화적 실험으로 전개되고 있다. 최근 김종관 감독은 서촌에 자리한 ‘어피스어피스’라는 전시공간에서 직접 각본을 쓰고 촬영과 편집까지 해낸 단편영화 <만들어진 이야기>를 연출한 뒤 해당 공간에서 소수의 관객을 받아 상영을 이어가는 자리를 마련한 바 있다. 영화와 현실의 다단한 경계를 너르게 담아낸 작품을 촬영장에서 관람하는 건 뷰파인더 전후와 프레임 안팎의 경계를 체감하는,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뒤엉키면서도 그 경계가 선명한 체험이 된다.
올해 무주산골영화제 개막작으로 공개된 <달이 지는 밤>은 김종관 감독과 장건재 감독이 무주라는 공간을 소재로 각기 만든 두 단편을 모아 구성한 영화다. 이중 김종관 감독이 연출한 <방울소리>는 대사를 절제하고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연출하며 스산하면서도 짙은 여운을 남긴다. 무주라는 지역에서 길어 올린 영감이 반영된 듯한 실존과 부재의 경계를 선연한 이미지로 부유하듯 구현하며 심상을 건드리는 방식은 김종관 감독의 영화가 새로운 영역으로 건너가는 징후처럼 보인다. 버려지고 잊히는 것과 낡아가고 쇠락하는 것을 향한 관심은 보다 미학적으로 심화된, 빛과 그림자를 아우르는 시선을 통해 심연의 경계로 구체화된다. 그래서 보고 싶다. 김종관 감독의 영화가 새롭게 내디딜 길이 나는 무척이나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