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싸게 만들어 비싸게 팔겠다는 욕망은 어떻게 붕괴하는가.
‘아직도 세상을 보이는 대로 믿고 편안히 잠드는가/그래도 지금이 지난 시절보단 나아졌다고 믿는가/무너진 백화점, 끊겨진 다리는 무엇을 말하는가/그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순 없다. 우리 모두 공범일 뿐.’ 1995년에 발매된 넥스트 3집 <The Return of NEXT part2 – World> 앨범에 수록된 ‘세계의 문 Part 2. 우리가 만든 세상을 보라’는 오늘날 보기 드물게 원색적인 가사로 세태 비판을 노래하는 프로그레시브 록 넘버인데 그래서 21세기에 듣기엔 민망하지만 21세기를 지나는 지금 보다 유효한 직설 같아서 더 민망하게 들리는 노래다.
21세기에 아파트가 무너진다는 것도 놀랍지만 지금도 구태의연한 회계 비리로 부실한 아파트가 지어진다는 것이 더 놀랍다. 무너진 것도 놀라운데 무너진 이유가 드러날수록 가관이다. 제대로 된 재료를 쓰지 않고,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무리한 일정을 밀어붙인 결과 다 올라가지도 못한 아파트가 일찍이도 무너졌다. 뜯어보면 뜯어볼수록 부실에 부실이 제곱근으로 더해져 해결책을 산출할 셈도 안 되는 기분이다. 우연한 실수가 아니라 예견된 인재였다는 정황이 너무 손쉽게 드러나서 허무할 정도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라 돈이 되는 상품을 판다는 목적이 더욱 중요해진 시대에서 사람이 안전하게 머물 터전에 대한 마음까지 바라는 건 애초에 무리였을지도 모르겠다. 국토부의 전수 검사로 무너진 아파트 이전에 지어진 아파트 중에서도 부실 공사를 했다는 정황이 더러 적발됐다. 일찍이 삼풍백화점도, 성수대교도 그렇게 무너졌고, 세월호도 그렇게 가라앉았다. 최대 이윤을 위한 증축과 신속과 과적의 욕망 안에서 인간의 삶은 압사하고, 추락하고, 수장됐다. 욕망에 눈이 먼 인재가 반복될 때마다 인간들은 교훈과 성찰을 찾지만 눈 앞의 이익은 손쉽게 눈을 가리고 마음을 먹어 치운다.
짓고 있던 아파트가 무너졌고, 그 잔해 어딘가 실종된 노동자가 있을 것이라는 소식 앞에 문득 몇 편의 영화가 떠올랐는데 그 중에서도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가 가장 맨 앞에 서있는 것 같았다. 권고사직을 거부한 본사 사무직 직원을 하청업체가 운영하는 지방 현장직으로 파견한 회사의 속내는 빤하다. 합법적으로 직원 하나를 정리하겠다는 의지가 명확하다. 하지만 결코 퇴사 당하지 않겠다는 직원의 의지도 명확하다. 그 여파는 지방 현장직으로 일하는 하청업체의 비정규직 직원에게 넘어온다. 기술도, 경험도 없는 본사 사무직 직원의 파견 근무를 유지하기 위해선 현장 비정규직 직원 하나를 정리해야 한다. 본사의 악랄한 인사 전략으로 인해 억울하게 내몰린 정규직 노동자와 힘이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갈등한다.
보는 내내 마음이 저리던 그 기분이 다시 살아났다. 제목이 부추기는 예감처럼 이 영화는 노동자의 현실을 다룬 영화다. 우리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심지어 실화를 바탕에 두고 있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갑을로 구분되는 세계 속에서 버티는 자들의 이야기란 필연적으로 기구하고 처량하고 억울하고 분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더 싸게 세상을 돌리고, 더 싸게 사람을 죽이고, 더 싸게 책임을 넘기고. 세상이 싸구려처럼 돌아가는 세상에서 인간의 값어치란 애초에 저울질의 대상도 아니다. 그저 언제든 대체 가능한 부품의 감정 같은 건 고려 대상도 아니다. 그저 싸고 신속하게 굴린 뒤, 쓸모가 사라지면 버리고 갈아 끼우면 될 일이니까.
인간을 위해 발전했다는 문명 안에서 인간이 가장 소외된다는 아이러니와 함께 많은 것들이 무너진다. 선거철마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와 함께 국가의 성장지표는 예년과 다르게 올라갔지만 모두 다 잘 사는 사회라는 슬로건은 여전히 비현실적이다. 값싸게 지어서 만든 집을 비싸게 산 사람들의 불안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불안의 알고리즘을 전전하는 영혼의 세계 같다. 먹고, 입고, 산다는 인간의 삶보다도 팔고, 남기는 이윤의 유혹이 더욱 공고해진다.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라 이윤을 남기기 좋은 상품을 높게 쌓는 세계에서 붕괴와 추락은 결코 낯선 비극이 아닌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 모두가 잘 사는 사회란 과연 가능한 것일까. 가장 중요한 것을 망각하면 가장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는 교훈을 반복적으로 주입해야 하는 세계에서 모두가 잘 사는 사회란 과연 가능한 것일까. ‘발전이란 무엇이며 진보란 무엇인가/누굴 위한 발전이며 누구를 위한 진보인가'라는 1995년의 가사가 더 유효해지는 원색적 욕망의 시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