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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Feb 08. 2022

매너가 승자를 만든다

2022 베이징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000m 경기를 보고 생각한 것.

한국은 전세계 국가 중 올림픽 쇼트트랙 종목에서 가장 많은 메달을 목에 걸었다. 어제 경기만 해도 대국 답게 빙질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계주 경기 터치는 생략한 채 금메달부터 사고 보는 중국의 막가파식 견제 전략을 가뿐히 제치고 결승선을 통과하는 선수들의 기세를 보면서 강국의 위엄을 실감했다. 그런데 실격이라는 필살기를 쓸 줄이야. 역시 대국은 대국이다. 안 되면 되게 한다. 만리장성 같은 건 아무나 짓는 게 아니다. 그런데 판정 문제를 떠나 우리 입장에서 돌아볼 것도 있는 것 같다.


김선태 감독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한국 국가대표 감독이었다. 그가 지금 중국 대표팀 감독을 맡게 된 건 중국에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평창동계올림픽 직전 드러난 쇼트트랙 대표팀 전 코치 조재범이 심석희 선수에게 가한 폭행 문제를 방임했다는 이유로 징계위에 회부됐고 결국 1년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다. 그 사이 중국의 러브콜을 받았고, 그렇게 중국 대표팀 감독이 됐다.


이번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단에 감독은 없다. 코치진 네 명이서 선수단을 이끌고 있다. 감독이 없는 건 말 그대로 감독 선임을 못했기 때문인데 한국빙상경기연맹은 도덕성 기준에 부합하는 적임자가 없어서 감독 선임이 불가능했다는 이유를 밝혔다. 말 그대로 문제가 없는 지도자 하나를 찾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한국 같은 쇼트트랙 강국에서 경기에 이길 노하우를 잘 아는 지도자급 인사가 없었을 리 없다. 그런데 도덕적 기준을 내세우니 뽑을 사람이 없었다는 건 그동안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던 것이었다.


알다시피 지금 중국 대표팀 코치를 맡고 있는 안현수는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3관왕을 포함 네 개의 메달을 딴 한국 대표팀의 간판선수였지만 뿌리 깊은 파벌 논란에 휘말렸고 러시아로 귀화해 빅토르 안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과정도 그런 파벌 논란과 무관하지 않다는 여론이 적지 않았다. 물론 한체대 출신인 안현수가 빙상연맹의 파벌 싸움에서 일방적인 희생자였다는 주장은 애매한 구석이 있는데 문제는 말 그대로 한체대파와 비한체대파 사이의 파벌 싸움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외 게임이 한국 쇼트트랙 신을 갉아먹다 못해 선수뿐만 아니라 지도자 인재풀을 근본적으로 망가뜨린 나비효과가 돼서 베이징까지 영향력을 발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 알다시피 조재범 코치의 폭행 피해자였던 심석희 선수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했다. 동료선수 비하와 욕설 문제가 폭로됐고, 해당 내용을 근거로 평창 동계올림픽 경기 당시 최민정 선수와의 고의적 충돌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그 결과 2개월 자격 정지 징계를 받아 올림픽 출전이 불발됐다. 그 와중에 국가대표 훈련 도중 황대헌 선수 바지를 내려 선수 자격 1년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고 중국으로 귀화한 임효준은 국적 변경 선수가 기존 국적으로 출전한 국제 대회 이후 3년이 지난 후 올림픽 출전이 가능하다는 IOC 규정에 막혀 중국대표팀 참가가 불가능했다. 그는 평창 금메달리스트였다.


물론 이번 쇼트트랙 남자 1000m 경기의 판정은 어벤져스가 와도 물 먹을 판이었다. 중국 선수를 상대로 예선에서 앞서면 실격이 되고, 결승에서 앞서면 옐로카드 징계를 먹이는 경기에서 무엇이 가능하겠는가. 이건 스포츠가 아니다. 시상식부터 하고 경기를 해도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해보자. 만약 우리가 김선태 감독과 조재범 코치를 비롯한 국가대표 지도자들을, 심석희 선수를 징계하지 않고 잘못을 묵인한 채 태극마크를 수여하고 올림픽에 출전시켰다면 어땠을까?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지도자와 선수를 만약 이런 올림픽에 내보내고 끝내 어처구니없는 결과까지 받아들였다면 보다 수치스러운 사태가 아니었을까.


그런 면에서 이번 올림픽에서 감독이 부재한 쇼트트랙 국가대표 팀의 현재는 국가대표라는 명예에 어울리는 자질과 책임을 외면했던 우리의 자성이 들어선 자리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이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최선의 기량을 발휘하고 있는 우리 선수들의 선전을 기원한다. 그리고 어이없는 판정에 분노하되 도가 넘는 비하는 삼가는 것이 좋겠다. 당장 짱개라는 비속어를 동원해 중국 욕을 하면 마음을 시원하겠지만 결국 같은 소인배가 될 테니까. 메달을 도둑 맞았다고 매너까지 질 필요는 없다. 매너가 승자를 만든다. 중국이 산 금메달은 어차피 두고두고 치욕의 증표가 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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