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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Feb 28. 2022

그의 이름을.

당신이 투표한 첫 대통령의 이름을 기억하시라.

올 것이 왔다. 대선 후보 선거공보물을 받았다. 제20대 대통령선거일이 불과 15일 남짓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있을 지금은 아마 더 적은 시일이 남았을 것이다. 이제 후보들의 어이없는 발언이나 행동에 실소를 터트리며 술자리 안주 삼아 떠들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인생은 콩트가 아니고, 세상은 <SNL 코리아>처럼 웃기기만 한 풍자극이 아니니까. 결국 누군가는 대통령이 될 것이고, 그때부터 웃기기만 하던 것이 웃플 수도 있고, 진짜 웃기 힘든 꼴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는 운전과 달리 전진보다 후진이 쉬운 법이니까. 


2002년에 실시된 제16대 대통령 선거는 유권자가 된 이후로 처음 한 표를 행사해본 대선이었다. 잘 알다시피 지금은 고인이 되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된 선거였다. 그는 내가 처음으로 한 표를 행사한 대선 후보였고, 처음으로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는 대통령이 됐다. 그리고 그는 요즘 대선 후보들이 저마다 유세 현장에서 외치는 ‘노무현 정신’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만큼 현재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추앙받는 록스타 같은 대통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하지만 살아생전의 노무현 대통령은 마냥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경선 시절부터 노무현은 당의 주축 세력이 아니었다. 당시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에서 비주류 세력으로 꼽히던 노무현은 대통령 경선 당시에도 유력 후보로 꼽히던 인사가 아니었지만 경선 과정에서 당시 유력 후보였던 이인제에 맞서 ‘노풍’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놀라운 지지율 상승을 이끌어내며 결국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대선 후보가 된 이후의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에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노무현은 2002 한일월드컵 개최 이후 인지도가 오른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추진했고,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단일 후보로 추대됐지만 대선 전날 갑작스럽게 지지 철회를 선언한 정몽준 후보의 집으로 찾아가 문전박대를 당했다. 당선은 물 건너간 것 같았다. 하지만 잘 알다시피 16대 대선은 노무현 후보의 극적인 승리로 끝났다. 정말 9회말 투아웃 역전 홈런 같은 승리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을 ‘구시대의 막내’라고 표현하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맏형이 되고 싶었다’라고도 말한 바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 민주당계 정당에서 처음으로 배출한 영남 출신 후보였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혼탁한 적이 있었나 싶은 요즘 대선 정국 안에서도 그나마 나아졌다고 느껴지는 게 있는데 소위 말하는 지역갈등을 조장하는 목소리는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건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과 무관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낡은 시대의 청산이란 피바람이 부는 개혁의 목소리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강변하는 얼굴의 등장으로부터 자연스레 태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대선 후보들이 노무현 정신을 외칠 때마다 종종 아연실색하는 기분을 느낀다. 대통령 임기 중에는 야당으로부터 무능한 대통령 취급을 받았고, 주요 일간지에서도 노무현의 실정을 비판하는 논평을 숱하게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박근혜 씨 이전에 국회로부터 탄핵 소추안이 통과돼 직무가 정지됐던 첫 번째 대통령이기도 했다. 퇴임 직후에는 측근 비리 혐의로 검찰에 송치돼 조사를 받았고,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기 전까지 온갖 추문에 시달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노무현이라는 이름 석자는 드높은 곳에서 추앙된다. 당시 그 이름을 비웃던 정치 인사들은 그 이름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고 손을 내민다. 정치가 생물 같은 것이라면 정말 이렇게 정이 안 가는 생물도 없을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운이 좋았다. 유권자 자격을 인정받은 첫 대선 후보 중에 노무현 대통령이 있었으니까. 물론 그에게도 공과가 있고, 무조건 추앙할 생각은 없다. 정치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니까.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공과를 두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고자 노력했던 몇 안 되는 대통령이었던 그를 기억하기에 이번 대선에서도 자기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후보를 뽑을 수 없겠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노무현은 그런 대통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구를 뽑았다는 사실을 훈장처럼 여기듯 구는 사람을 보는 것도 꼴 보기 싫은 법이지만 언젠가 내가 뽑았다는 것이 창피하게 느껴질 만한 이의 실정을 보는 건 스스로에게 괴로운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무도 뽑지 않는 것이 가장 편하게 느껴지겠지만 포기하지도, 착각하지도 않길 바란다. 한 표를 행사했다고 해서 그에게 모든 걸 내던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한 표를 행사했다는 건 그의 책임을 끝까지 감시할 권리를 얻는 일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꼭 투표하고 기억하시길. 당신의 첫 대통령을, 그의 이름을.


(명지대학교에서 발행하는 학보 <명대신문>에 쓴 '민용준의 허허실실'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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