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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Mar 13. 2022

지금 지구 걱정할 때가 아니야

'더 로드'와 '돈 룩 업'으로 보는 기후 위기와 인류의 생존에 대하여.

세상은 어느 날 갑자기 불타올랐고, 그렇게 폐허가 됐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작가 코맥 매카시의 소설 <로드>의 재앙에는 특별한 인과가 없다. 그저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망해버린 세상이라는 결과 속에서 구차해도 끈질기게 살아남아보려는 어느 부자의 삶을 그린다. 처음에는 이 소설이 재앙 같은 디스토피아 속에 매몰된 인간들에 관한 우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만큼 예언적인 소설이 있을까 종종 생각하게 된다.


산이 타오르고 있다. 지난 3월 4일, 경북 울진과 강원도 영월에서 시작된 산불은 몇 밤이 지나도 꺼질 줄 몰랐다. 건조주의보가 내려진 가운데 바람까지 거센 탓에 진화가 쉽지 않았다. 동원할 수 있는 인력과 장비가 죄다 투입됐지만 산불은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경북 울진에서 시작된 산불이 강원도 삼척까지 번졌다. 누군가의 집도 새까맣게 타버렸고, 불타올라 폐허가 된 집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매캐해졌다.


강원도 영월의 산불은 가까스로 나흘 만에 진화했지만 강원도까지 번진 경북 울진의 산불은 노송 8만 그루가 자라는 금광송 군락지까지 불똥이 날아들며 장기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에 발생한 경북 울진 산불은 지난 20여 년간 발생한 산불 중 최대 규모로 알려졌다. 발생 3일 만에 여의도 51배에 달하는 면적의 산림이 잿더미가 됐다. 산불을 피해 대피한 주민의 수가 7000여 명에 달한다. 문제는 이런 문제가 비단 어쩌다 일어난 올해만의 재난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건 시작일지도 모른다.

코맥 매카시가 <로드>를 처음 구상한 건 환갑이 넘은 나이에 얻은 어린 아들과 여행 중이던 미국 엘패소의 낡은 모텔에서였다. 어둠이 까맣게 물든 새벽 2시쯤, 노년에 접어든 나이에 비로소 얻게 된 어린 아들의 잠든 얼굴을 내려보던 코맥 매카시는 문득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50년 뒤, 100년 의 풍경을 상상하다 불타오르는 세상과 마주했다. 이를 토대로 두 장 분량의 글을 썼다. 그리고 뒤늦게 알았다. 이건 세상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부자의 이야기구나. 그렇게 발전된 이야기가 <로드>다.


<더 로드>는 잠든 어린 아들을 내려다보다 문득 내다본 창 너머로 불타는 세상을 떠올린 코맥 매카시가 쓴 바로 그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어린 아들(코디 스미스 맥피)과 함께 길을 걷는 아버지(비고 모텐슨)의 누추한 행색 옆으로는 앙상하게 말라 부서지고 쓰러지는 나무들이 누운 황량한 풍경뿐이다. 아내이자 어머니였던 여자(샤를리즈 테론)는 불타오르고 멸망하는 세상을 일찍이 견디지 못해 머리에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그리고 살아남길 결심한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끌고 자신의 소임을 다한다. 잿빛의 세상에서도 어떻게든 어린 아들을 살리겠다고 고군분투한다.


원작 소설과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도 재앙의 근원은 등장하지 않는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일언반구 없다. 코맥 매카시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더 로드>의 아버지와 어린 아들은 도둑처럼 찾아와 문명이 이룩한 모든 것을 삽시간에 훔쳐간 재앙의 결과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저 걷고 먹을 수 있는 것을 찾아 가까스로 끼니를 때우며 살아남는 것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은 마냥 호락호락하지 않다. 문명의 그림자조차 사라진 듯한 폐허의 세계는 다시 야만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인간은 더 이상 친절을 베푸는 존재가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이들을 잡아먹는 것도 살아남는 방편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인간들도 생겨났다.

코맥 매카시는 대재앙의 성격을 밝히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와 같이 말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화산 활동이든, 핵전쟁이든, 그 무엇이라 해도 상관없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이후에 무엇을 하느냐는 것이다.” <더 로드>에서 아이는 아버지에게 묻는다. “우리는 착한 사람인가요?” 아버지는 답한다. “그렇단다.” 선악이라는 가치가 이토록 무능해진 세상에서 아이는 선을 묻고 아버지는 그 선에 답한다. 희망을 꿈꾼다는 것이 불순해진 세상에서 부자는 선을 꿈꾼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일말의 희망이다. 살아남는 것 외에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세상에서 아버지에게 특별한 이유를 만들어주는 건 결국 어린 아들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말한다. “우리는 불을 옮기는 사람이야.” 그렇게 아버지는 희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들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씨나마 안기려 한다. 잿더미가 된 세계에서 다시 희망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을 설득하려 한다.


지난 몇 년 사이 세계 곳곳이 심상치 않게 불타올랐다. 그리스에서도, 터키에서도, 이탈리아에서도, 러시아에서도, 미국에서도, 호주에서도, 거대한 불길이 산과 산을 타고 넘어와 세상을 태우고 있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좀처럼 잡히지 않는 불길에 잡아 먹히지 않으려면 불길을 등지고 최대한 멀리 달아나는 수밖에 없다. 화염으로 물든 아테네 북부 파르니타산을 등지고 달아나는 주민들 위로 피어오른 검은 연기 아래로 재가 비처럼 내렸다고 한다. 임야를 태운 산불로 피어오른 연기가 가득한 대기로 산란한 빛으로 인해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우리는 지금 인류 종말에 관한 티저 예고편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재앙은 예의 바른 손님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씩 재앙을 그렇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하다. <빅쇼트>와 <바이스>를 비롯해 현실 풍자적인 영화를 만들어온 감독 아담 맥케이의 신작 <돈 룩 업>은 바로 그런 현실을 핵폭탄 같은 유머에 실어 풍자하는 코미디 영화다. 천문학과 대학원생 케이트(제니퍼 로렌스)는 천체를 관측하던 중 지구로 다가오는 혜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혜성의 움직임을 계산하다가 지구와 충돌할 가능성이 100%에 가깝게 수렴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케이트의 말을 듣고 직접 계산해본 담당 교수 랜들 민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역시 확신한다. 이 혜성은 지구를 멸망시키려고 날아오는 중이다.


‘위를 올려다보지 말라’는 의미 정도로 해석되는 제목 <돈 룩 업>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역설이다. 이렇게 심각하고 중대한 사안을 알리기 위해 나사를 찾아간 케이트와 랜들 민디는 결국 백악관에서 대통령(메릴 스트립)을 만나게 된다.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심각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대통령은 지구의 위기를 실감하지 못한다. 아니, 할 생각이 없다. <아마겟돈> 같은 영화가 사람을 망친 것인지 모르겠지만 위기의식이 심각하게 떨어진다. 그래서 방송에 나가 이 모든 사실을 폭로하려고 한다. 하지만 방송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기보다 농담처럼 유희하고 이런 태도에 격분한 케이트는 태도 논란에 휘말리며 온라인 상에서 밈이 돼서 조롱거리가 돼 버린다.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기후도 신경 쓰지 마.” <돈 룩 업>을 홍보하기 위한 인터뷰에서 아담 맥케이는 기후 위기에 관한 화두를 꺼냈다. “최근 컴퓨터 모델링에 따르면 8년 안에 92%의 국가가 100년 만에 한 번 올 법한 더위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어떻게 이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 거지?’ 정말 놀랍다. 이건 문명의 위기인데. 어째서 관련된 보도도 안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돈 룩 업>은 바로 이렇게 앞 길이 뻔한 인류의 위기를 외면하는 우리 자신을 향한 일침 같은 영화인 셈이다.


전 세계 탄소중립 정책 수립을 위한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는 2050년까지 탄소배출을 최소화해서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1.5℃ 이하로 방어하자고 합의했다. 지구의 평균기온이 2℃ 올라가면 여름이 3주 늘어나고 극한의 폭염과 홍수, 가뭄이 잦아진다고 한다. 결국 지구의 온도가 인류의 미래인 셈이다. 1.5℃는 안전벨트 같은 숫자다. 평균기온의 가파른 상승은 인류의 위기를 그리는 J커브 곡선과 같다. 재앙에 기승전결의 안정적 전개 따윈 없다. 어느 순간 다다라버린 결말은 돌이킬 수도 없다. 우리는 번져 나가는 산불 앞에서도 무력함을 느끼는 존재다. 그러니 이제라도 심각하게 걱정해야 한다.


가끔씩 지구를 살려야 한다는 구호를 듣게 되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지구 걱정할 때가 아니다. 우리 자신을 걱정할 때다. 단언컨대 지구는 우리보다 강하다. 우리 모두가 사멸해도 지구는 끝내 존재할 것이다. 인류는 더 이상 착각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우리는 아직 덜 달궈진 프라이팬 위의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지구가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는다. 사랑하는 가족과 반가운 친구와 귀여운 반려동물이 모두 지구에서 죽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라도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지구의 위기가 아니라 우리의 위기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지금 당장은 산불을 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칫하면 그저 모든 것이 불타오르는 풍경을 보게 될 것이다. 그때 불을 옮기는 건 이미 늦은 일이다. 바로 지금이어야 한다.


(환경부 공식 블로그 '지구랩소디' 섹션에 게재한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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