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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Mar 14. 2022

'레벤느망' 어제의 질문에 비춘 오늘

'레벤느망'은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답해야 할 오늘을 떠올리게 만든다.

자전적인 고백을 담담하게 기술한 문장으로 명성을 얻은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에세이 <사건>은 임신 중절이 금지된 1960년대 프랑스 여성이었던 자신이 1964년에 감행했던 불법적인 임신 중절에 대한 기록이다. 프랑스에서 임신 중절이 합법화된 건 1975년의 일이었고, <사건>은 1999년에 발간됐다. 80페이지 남짓한 문장은 어려움 없이 술술 읽히지만 읽어 내려가다 보면 간혹 각오가 필요하다. 종종 앞에 자리한 바늘을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은 첨예한 통증이 어른거린다.

아니 에르노의 <사건>을 영화화한 <레벤느망>은 지난해 열린 제78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레벤느망>을 연출한 오드리 디완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여섯 번째 여성 감독이 됐다. 그 밖에도 <파워 오브 도그>를 연출한 제인 캠피온이 감독상을 수상했고, 배우 출신 감독으로서 첫 연출 데뷔작 <로스트 도터>를 발표한 매기 질렌할도 각본상을 수상하며 여성 감독의 선전이 돋보이는 영화제가 됐다. 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은 봉준호 감독은 시상식 이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마음이 끌리는 대로 갔는데 수상작을 보니 여성 감독들이 있었던 것”이라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레벤느망>이 아니 에르노의 <사건>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라는 사실은 주인공 안(아나마리아 바토로메이)의 이름을 통해 더욱 명확해진다. 안은 평범한 대학생이다. 이성에 관심이 많고, 학업 성적도 준수하다. 언젠가 작가가 되길 꿈꾼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문제가 자라나기 시작한다. 생리가 멈췄다. 그리고 배에서 미세한 통증을 느낀다. 종종 경련도 일어난다. 그래서 찾은 병원에서 의사로부터 날벼락 같은 진단을 받는다. 임신했다는 진단을 받는다. 어떻게든 해달라는 안에게 의사는 법을 쉽게 보지 말라며 불법적인 시술로 죽는 여자가 많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뱃속의 태아가 점점 자라나는 만큼 안의 고민도 커져만 간다.

아니 에르노의 담담한 문장만큼이나 인물을 담담하게 응시하는 카메라는 시종일관 찰랑거리는 수면 위에 떠 있듯 미세하게 흔들린다. 어지럽지 않지만, 한시도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듯한 시선은 그렇게 안의 주위를 맴돈다. <레벤느망>은 시작부터 끝까지 안을 주시하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관객에게 중계한다. 그 시선 너머에서 안은 기이한 벽에 부딪히며 혼자만의 물음표를 감당해야 한다.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녀가 꿈꾸는 삶은 허구가 돼 버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합법적인 선택권이 없다. 심지어 이런 얘기를 함부로 꺼내면 헤픈 여자 취급을 받게 될 테니 마음 놓고 상의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안이 감당해야 하는 갑갑한 현실만큼이나 비좁은 1.37:1의 화면비율은 여성의 육체를 가둔 어떤 시대의 강압을 대변하는 것만 같다. 안의 고민이 커질수록 화면 너머의 심리는 갑갑해진다. 물론 이것은 지난날의 사연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세계가 있다. 임신 중절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나라가 적지 않다. 한국 역시 비교적 최근인 2021년 1월 1일에서야 낙태죄가 폐지됐다. 무조건적인 임신 중절이 가능한 건 아니지만 건강상 이유로 임신 유지가 어려운 경우 임신 중절을 허용한다.

아이를 낳는다는 건 분명 귀한 일이다. 하지만 원치 않는 임신을 사회적 강요로 이어가야 하는 개인이 있다는 건, 그리고 자신의 육체로 타인의 일방적인 결정을 감당한다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다. <레벤느망>은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보단 질문을 던지는 영화를 좋아한다”라는 오드리 디완 감독의 말처럼, 이상한 세계를 향한 또렷한 질문이다. 아이를 지우기 위해 아슬아슬한 수단을 강구하고 감행하는 안의 모습을 지켜보는 불편함은 결국 무심한 사회적 합의가 누군가의 육체를 옭아매는 폭력 그 자체일 수 있음을 실감하게 만든다. 그렇게 지난날을 재현하며 전한 실감은 현재를 살피는 감각으로 돌아온다. 그래도 분명 오늘은 어제보다 나은 세상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 성실하고 끈질기게.


(명지대학교에서 발행하는 학보 <명대신문>에 쓴 '민용준의 허허실실'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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