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여정을 다시 살아가고 싶게 만드는 영화 두 편.
이륙 직전의 비행기에 앉아있는 것만 같다. 영화가 시작하기 직전의 기분이란. 모든 여행이 언제나 좋을 수만은 없겠지만 떠나기 직전의 설렘만큼은 늘 보존되듯 보고 싶은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리는 순간에도 가슴이 뛴다. 그러니까, 영화와 여행이라는 단어가 동의어까진 아니라 해도 유의어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는 모든 길이 통한다는 바로 그 도시를 가리키는 제목이 아니다. 멕시코시티의 부촌, 그러니까 한국으로 치자면 청담동쯤 해당되는 동네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탁월함을 설명하자면 천일야화 같은 시간을 보내도 부족함이 없겠지만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관객을 영화라는 영토로 인도하는 완벽한 착륙이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보고 또 봐도 매혹적이다.
질서정연한 정사각형 블록 바닥 위로 파도처럼 밀려오고 밀려가는 물거품이 흩어지자 그 위로 비행기가 가로질러 날아간다. 천천히 고요하게. 바다도 있고, 하늘도 있고, 비행기도 나는 그 바닥을 비추던 카메라가 비로소 고개를 들자 어느 주택의 마당이 눈에 들어온다. 멕시코 시티의 콜로니아 로마의 22번지 주택에서 촬영된 <로마>의 오프닝 시퀀스는 우리에게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답변을 동시에 담고 있다. 물이 흥건한 바닥에 반사된 하늘 사이를 가르며 날아가는 비행기의 모습은 영화라는 것이 그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면서도 그것을 발견한 자의 것임을 대변하는 마술적인 경험에 가깝다. 영화의 육체와 영혼이 모두 그 장면 속에 존재한다.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의 유년시절이 반영된 자전적인 작품이란 점에서도, 그가 유년시절을 보낸 멕시코시티의 풍경을 중계한다는 점에서도, 그의 유년시절이 머물렀던 멕시코의 한 시대를 관통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남다른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의 흑백 영상은 결국 알폰소 쿠아론이라는 개인의 심상 속에 자리한 빛바랜 기억일 것이다. 그래서 그 기억을 함께 본다는 건 기본적으로 지극히 사적인 동참일 수밖에 없지만 끝내 어느 개인의 삶을 둘러싼 시대의 공기와 호흡하는 일이 된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영화적 모험이 된다. 아무리 멀리 날아간다 한들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여정을 그렇게 방구석 1열에서 체감한다.
로맨스란 상실을 먹고 자라는 나무와 같다. 과거가 없는 사람은 없다. 사랑의 역사란 단 한 줄의 나이테로 기록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랑의 끝은 결코 실패가 아니다. 그저 계절이 지나가듯 때가 되면 물러가는 마음이 존재할 뿐이다. <라라랜드>는 그 계절에 관한 영화다. 이미 제목에서 LA가 세 번이나 등장하는 <라라랜드(LA LA LAND)>는 할리우드 드라이브, 그리피스 천문대, 허모사 비치 부두, 리알토 극장 등 LA 곳곳을 세계적인 명소로 만들어버린 영화이기도 한데, LA 외곽도로를 주말 이틀 동안 통째로 비우고 도전적인 원신 원컷으로 촬영했다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황홀한 압도감을 선사한다. 고전적인 뮤지컬 영화의 활기를 불어넣으며 영화의 온도를 들뜨게 만든다. 그야말로 ‘로맨틱, 성공적, 라라랜드’랄까.
덕분에 <라라랜드>를 본 많은 이들이 느낀 배신감을 이해한다. 그토록 꿈꾸던 자신의 재즈바 ‘셉스’의 주인이 된 남자와 그토록 염원하던 할리우드의 스타로 우뚝 선 여자는 더 이상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커플이 아니다. 이처럼 로맨틱한 영화가 끝내 아름다운 커플의 결별을 선언하다니, 두 남녀의 사랑을 응원했던 관객 입장에서는 분명 억장이 무너지는 결말일 수밖에. 하지만 <라라랜드>는 결코 비극이 아니다. 그 사랑은 실패한 것이 아니다. 비록 이별을 맞이했다고 하지만 함께했던 세월을 등지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가 이룬 꿈을 마주하고 비로소 미소 짓는다. 함께 사랑하며 함께 꿈꿨던 그 계절을 되새긴다. 그 계절 덕분에 맞이한 빛나는 오늘을 깨닫는다. 사랑했기 때문에 맞이한 빛나는 오늘을 살고 내일로 간다. 다시 또 꿈꾸고 사랑하기 위해서.
떠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돌아온다는 말을 괄호로 품고 있다. 모든 여행은 돌아오는 것으로 완전해진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건 그만큼 멀리 떠날 수 있다는 용기를 준다. 그리고 좋은 영화를 만난다는 건 좋은 인생을, 좋은 시절을, 좋은 여정을 만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좋은 영화를 다시 본다는 것은 좋은 기억으로 다가오는 여행지를 다시 찾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리고 여행의 끝이 결국 돌아오는 것이듯 영화의 끝은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좋은 영화는 결국 살아가는 힘을 준다. 살아갈 힘을 주는 영화를 만난다는 건 그만큼 귀하고 중한 일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고로 다시 재생한다. 한 번 더 돌아오기 위해서. 다시 살아가기 위해서.
('론리플래닛 코리아'에 썼던 에세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